logging in or signing up Goheung tuor anselum Download Post to : URL : Related Presentations : Share Add to Flag Embed Email Send to Blogs and Networks Add to Channel Uploaded from authorPOINT Insert YouTube videos in PowerPont slides with aS Desktop Copy embed code: (To copy code, click on the text box) Embed: URL: Thumbnail: WordPress Embed Customize Embed The presentation is successfully added In Your Favorites. Views: 261 Category: Entertainment License: All Rights Reserved Like it (0) Dislike it (0) Added: September 10, 2007 This Presentation is Public Favorites: 0 Presentation Description In Goheung, there are various space- related centers including Space Center, Space Experience Center and the Youth Space Camp, making itself a modern and sophisticated county. For that reason, Goheung is called “A place embracing the past, pres Comments Posting comment... Premium member Presentation Transcript Slide1: 정해생 60돌 합동 생신 기념 행사를 축하 드립니다 ! Slide2: Slide3: Slide4: 봉래면 상록수림 - 외나로도의 북서쪽 해안에 인접해 있으며 바로 그 남서쪽에는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위34°28′, 동경127°27′에 위치하며 난대북부에 해당된다. 평균기온 섭씨 14℃, 강수량은 1,400mm에 이르러 상록활엽수가 번성하는데 알맞는 기후조건을 이루고 있다. 난대특유의 임상을 지니고 수령 100년이상 흉고직경(胸高直徑) 1m에 이르는 동백나무 100여주, 수령 300년이상 수고 10m이상의 구실잣밤나무 300여주, 수령 50년이상 수고 8m이상의 후박나무 50여주가 임상을 표현하는 주요수종. 그밖에 황칠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보리밥나무, 자금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Slide5: Slide6: 능가사 범종 Slide7: 능가사 사적비 Slide8: 옥하리 홍교 -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여산 마을을 흐르고 있는 너비 8 ~ 9m의 고흥천 위 아래에 약 200m의 간격을 두고 2개의 홍교가 있다. 먼저 서문리다리를 보면 맨밑에 편단석을 설치한 뒤 27개의 직사각형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반원형의 홍예를 이루었는데, 한줄은 1개의 장대석을 다른 한줄은 2개의 장대석을 붙여 차례로 짜올라 갔다. Slide9: 능가사 대웅전 - 능가사는 삼국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팔영산 하단부에 있는 평지형 사찰로 일명 보현사라고도 전한다.임진왜란때소실된 것을 인조 22년(1644)에 벽천대사가 현위치에 2개 동의 사찰을 중건하여 능가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대웅전은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다. 일단의 시멘트 기단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간 거칠게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비하여 조그마한 기둥머리가 창방과 용머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머리가 외 3출목, 내 4출목의 공포를 받쳐주고 있다, 살미첨차의 앙혀의 굽변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 역시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하게 깎았다. 중앙칸은 4분합문이며 기둥 사이 포가 3조 있으며, 협문은 2분합문으로 기둥 사이 포가 2조, 퇴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조가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겹쳐마이며 직경이 큰 서까래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조그마한 닷집이 4개의 높은 기둥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높은 기둥이 지지하고 있다. 내부공포는 운공형으로 조식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커다랗게 결구되어 있으며 맨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되어 있는 우물천장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창호의 무늬는 빗살무늬문을 하고 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건물 방향이 입구 때문에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나 양식면에서 귀중한 유산이라 하겠다. 건물 전체가 기울어 1999년부터 완전 해체 하여 2000년 12월 완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Slide10: 금탑사 극락전 - 금탑사는 고흥에서 15.5km 떨어진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금탑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유재란 때 사원 전체가 불탔으나 선조 36년(1603년) 궁현·옥순(弓弦·玉淳)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숙종 18년(1692)에 또 참화를 입고 현재는 극락전만 남아 있으며 최근에 건립한 명부전, 삼성각, 종각, 요사체 등이 있다. 극락전은 축대형식으로 쌓은 3단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Slide11: 고흥 향교 - 고흥 향교는 세종 23년(1441)에 처음 세웠으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됨에 따라 한 때 성동촌으로 옮겼다가 숙종 21년(1695) 현 위치에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 제기고(동·서무), 교직사 등이 있으며 명륜당 좌우에 있는 은행나무는 350여 년 된 것으로 창건 당시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 명륜당, 동·서재, 내삼문, 대성전 순으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경사지 건축으로 전체적으로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동·서재와 제기고(祭器庫)는 좌우대칭의 배치를 보여준다. 대성전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높이 약90cm인 기단을 놓고 자연석 덤벙 주춧돌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2고주 5량이며 공포는 초익공양식이다. Slide12: 용산리 석조보살좌상 이 석불은 고흥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쯤 떨어진 두원면 소재지 문무정(文武亭)이 위치한 야산 구릉상에 있다. 나지막한 야산 평지에서 옛 기와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 일대에 사찰이 경영되었거나 혹은 감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북에서 약간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 석불은 대좌에 몸체가 한돌로 되었으며, 대좌 이하는 땅속에 매몰되어 자세한 형식은 알 수 없다.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쓴 상태이며 보관 하단으로 구슬 무늬로 장식된 띠를 두르고 전면 중앙에는 화불 1구가 조각되었다. Slide13: 이충무공친필첩자 이 첩자는 수군통제사 이충무공이 전시 체제하의 긴급한 상황에서 왕명에 따른 직권으로 발한 차첩문서 즉 직첩의 특이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수군 전력이 극히 약화된 정유년(1597)말 연해지역 의병장에게 공식적으로 그 지휘권을 부여함으로서 원활한 군사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첩자의 대상인물은 흥양의 의병장 신군안(申君安)이다. 자는 효원, 본관은 고령이며 중종30년(1544) 흥양에서 현감 수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Slide14: 이충무공 친필 첩자 이 첩자는 수군통제사 이충무공이 전시 체제하의 긴급한 상황에서 왕명에 따른 직권으로 발한 차첩문서 즉 직첩의 특이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수군 전력이 극히 약화된 정유년(1597)말 연해지역 의병장에게 공식적으로 그 지휘권을 부여함막關?원활한 군사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첩자의 대상인물은 흥양의 의병장 신군안(申君安)이다. 자는 효원, 본관은 고령이며 중종30년(1544) 흥양에서 현감 수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을 지낸 다음 정유재란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바다와 육지를 전전하던 중 그해 12월 수군통제사로부터 의병장 선정의 첩지를 받았다. 그 뒤 연해지역 7읍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뒤 선조 31년(1598)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兼三道通制使差定」事今月初十日 祗受有旨內沿海」各官各義兵等當屬于卿指揮」討賊○ 겸삼도통제사차정」사금월초십일 지수유지내연해」각관각의병등당속우경지휘」토적○ 有旨叱分不喩沿海各官大小義兵○道○○○○○○南康津」長興寶城之賊多數斬○而興陽」 유지질분불유연해각관대소의병○도○○○○○○남강진」장흥보성지적다수참○이흥양」 人段今至四朔一不○告意謂無遺」附賊爲如平今見告目內辭緣則極」爲可嘉爲乎○用良義○ 인단금지사삭일불○고의위무유」부적위여평금견고목내사연칙극」위가가위호○용양의○ 將差定」爲去乎管下募聚之人協心同力無」遺剿殺登時馭爲平乎矣所率」軍人中如有○從令 장차정」위거호관하모취지인협심동력무」유초살등시어위평호의소솔」군인중여유○종령 者○去等尤」甚一人行刑報母失○機向事」合下仰照給施行須至帖者」右下興陽副護君申君 자○거등우」심일인행형보모실○기향사」합하앙조급시행수지첩자」우하흥양부호군신군 安准此」萬曆二十五年十二月十四日在寶花島帖子手決 안준차」만력이십오년십이월십사일재보화도첩자수결 첩자의 내용은 ① 연해지역 각관과 현지 의병에 대한 지휘 통솔권이 수군통제사에게 주어졌다는 것 ②신군안이 보낸 의병활동 결과보고에 치하한다는 것 ③ 의병장에 임명하니 더욱 분발하여 싸우되 특히 군률을 엄격히 하라는 것, ④ 1597년 12월 고하도에서 흥양의 부호군 신군안에게 차첩한다는 것 등이다. 이 첩자는 이충무공의 통제사 재임 중 발한 친필 의병장 차첩으로서는 현재까지 유일한 문서이다, 임진란때 수군전력 증강에 연해지역의 의병운동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해 준 첩자로 임진 의병사와 해전사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Slide15: 류몽인 위성공신 교서 - 이 문서는 광해군 5년(1613) 위성공신 3등에 책훈된 한성좌윤 유몽인(柳夢寅)에게 내려진 교서로 원명은 '교갈충진성위성공신가의대부한성부좌윤영양군유몽인서'이다, 위성공신이란 임진왜란 때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 분조를 호위하고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 하여 훈적에 올린 신료들을 말한다. 1등에는 최흥원 등 10명을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 3등에는 유몽인 등 53명에게 '갈충진성위성공신'이란 공신호를 하사였다. 이에 의하면, 3등 공신인 유몽인에게 본인은 물론 그의 부모 처자에게도 1계가 가자되었을 뿐 아니라 노비·전결·은자·기마·표리 등이 아울러 내려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유몽인(1559 ~ 1623)은 「어우야담」의 저자로서 조선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자를 응문, 호를 어우당 또는 양재, 본관은 고흥이다. 사간을 지낸 충관의 손자이며 탱의 아들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임란 직전에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왜란 발발 직후에 돌아와 의주 행궁에서 복명한 후 세자시강원 사서로 있으면서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다. 난후에 황해도 감사, 한성부좌윤, 승정원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Slide16: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 본 사천왕상은 능가사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 안에 4구가 배치되어 있다. 1995년 8월초, 천왕문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초창연대는 1666년(현종 7)이며, 중창은 1824년(순조 24), 3창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세 번에 걸쳐 보수중창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은 1690년(숙종 16)에 세운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비문(사적비 후면 음기(陰記) 사찰 시주자 명단편에 기록)의 일부를 보면 『天王門 化主 是閑 別座 懷益 王像(天王像) 化主 天日 沖印(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천왕상) 화주 천일 충인)』이라 하였다. 위 내용에 의하면 천왕문 건립과 사천왕상 조성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적비의 기록대로라면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최초 초창연대가 1666년(현종 7)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Slide17: 월포농악 - 남도농악은 연행 방식, 복식, 음악성 등을 기준으로 볼 때 크게「左道굿」, 「右道굿」, 「도서해안굿」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도굿은 남도의 동북부 산간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이며, 우도굿은 남도의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Slide18: 한적들노래 - 전남의 들노래는 음악적 특성과 가창 방법으로 보아 크게 세 개의 분포권으로 구분되는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서부 평야 지역의 긴소리권, 섬진강 유역에서 여천과 고흥으로 뻗어 내린 전남 동부지역의 산아지타령권, 그리고 남해와 서남해 도서 해안 지역의 절로소리권이 그것이다. 고흥군 한적 들노래는 분포권상 산아지타령권에 속한다, Slide19: 발포 만호성 발포진성은 현재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중심으로 있다. 이 성은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5포(5관 : 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 5포 :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중 수군만호가 다스린 수군진성으로서 성종21년(1490) 축성되어 고종 31년(1894) 폐지된 조선 초기의 성이다. 또 이 성은 선조13년(1580) 이순신장군이 36세 때 발포만호로 부임해와 18개월 동안 재임했던 인연을 맺고 있다. 발포진성에 관한 기록은 『성종실록』에 보이는데 권245, 21년 경술 9월조에『축…전라도발포성주일천삼백육십척병고십삼척(築…全羅道鉢浦城周日千三百六十尺竝高十三尺)』이라 하였으며 성종21년(1490) 적양성, 지세포성, 안골포성 등과 함게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Slide20: 백로 및 왜가리 도래지 도화면 발포리는 고흥읍 소재지에서 직선거리로 약 15km 떨어진 해변마을로 이곳은 이충무공의 수군만호의 역임지로 역사적 유서가 있는 곳이다. 발포마을 동쪽 해발 70m에 야산이 있는데 이곳은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와 천연생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 잡목수림에 수백년 전부터 왜가리가 3월초부터 날아와 8월까지 살고 있으며 최근 수년전부터는 백로가 도래하여 함께 살고 있다. 느티나무와 팽나부등의 잡목 상부에 백로와 왜가리가 뒤섞여 수많은 둥지를 짓고 살고 있으며 그 수는 대략 500마리 이상으로 헤아려 진다. 이들은 낮에는 먹이를 찾아 바다와 강가로 나가며또한 백로가 들어온 뒤 부터는 왜가리가 생태적으로 그 숫자가 감소되고 있다는 주민들의 얘기다. 백로(白鷺 heron/Ardeidae) 황새목 백로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 영어명은 일반적으로 heron이라고 하는데, 쇠백로는 egret, 일락해오라기·덤블해오라기는 bittern이라고 한다. 백로과는 15 ~ 20속 약 62종으로 분류되며, 극지를 제외한 전세계에 분포한다. 백로과는 크게 참 백로와 덤블해오라기류로 구분할 수 있다. 참 백로류는 왜가리·쇠백로·황로·횐날개해오라기·검음댕기해오라기 등의 주행성 백로류와 해오라기·붉은해오라기 등의 야행성 해오라기류, 열대 정글에 서식하는 원시적인 백로류를 포함하여 백로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덤블해오라기류는 덤블해오라기속과 알락해오라기속으로 나뉘며 뛰어난 의태행동으로 갈대밭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전체길이는 28 ~ 145cm이다. 백로류는 모두 목·다리·부리가 길고, 섭금형(涉禽型)의 몸형이다, 다만 해오라기(Nucticorax nycticorax)와 붉은해오라기(Gorsachius goisagi)는 비교적 목이 짧다. 백로류는 날 때에 긴 목을 Z자 모양으로 구부리는 특징이 있으며, 날개는 폭이 넓고 둥글며 천천히 날개를 펴서 비상한다. Slide21: 흥양현읍성 - 흥양현조 흥양읍성에는 읍성 주위 3,800척, 높이 12척, 치성 322, 옹성 2, 곡성 13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둘레 1,520척, 높이 15척이라 되어 있어 성 둘레와 성높이가 맞지 않은데 이것은 책의 편찬 당시의 척수가 틀리든지 아니면 오자로 볼 수 있겠다. 이를 영조척(31.19cm)으로 환산하면 성 주위가 약 1,215m, 높이가 약 3.7 ~ 4.7m가 된다. 그런데 현재 읍성이 많이 파손되고 민가가 들어서 있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당시 성곽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Slide22: 무열사 -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무장 진무성(陳武晟)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에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용강사는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건립되어 진무성 장군을 비롯하여 3인이 제향되었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사우 일제 철폐령에 의해 훼철당한 후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는 무열사에 진무성 장군 1인만 제향되고 영정이 있다. 진무성(1566 ~1638)장군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군 진중(陳中)의 해전에서 대공(大功)을 세운 무장(武將)으로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부사 인해의 아들로서 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자원출전 옥포·적진포(玉浦·赤珍浦)등지의 해전에서 사도첨사 김완(金浣)등과 더불어 많은 왜병을 참획하였으며, 특히 당포해전시 적선에 뛰어들어 왜병의 목을 베고 적선을 불태우는 등 이순신이 장계에 기록할 만큼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Slide23: 송씨 쌍충일렬각 -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송제(宋悌·1547 ~ 1592)와 그의 부인 열녀능성구씨(烈女綾城具氏)의 자결열행을 표창하고, 병자호란때 순절한 제(悌)의 조카인 송덕일(宋德馹·1566 ~ 1616)의 충열(忠烈)을 기리기 위해 1797(정조 21) 후손 송계필(宋啓弼)의 상소로 건립된 정려각(旌閭閣)이다. 1920년 1차 중수되었으며, 1979년 2차 보수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쌍충일열지려(雙忠一烈之閭)'라고 되어 있다. Slide24: 송씨 쌍충일렬각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송제(宋悌·1547 ~ 1592)와 그의 부인 열녀능성구씨(烈女綾城具氏)의 자결열행을 표창하고, 병자호란때 순절한 제(悌)의 조카인 송덕일(宋德馹·1566 ~ 1616)의 충열(忠烈)을 기리기 위해 1797(정조 21) 후손 송계필(宋啓弼)의 상소로 건립된 정려각(旌閭閣)이다. 1920년 1차 중수되었으며, 1979년 2차 보수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쌍충일열지려(雙忠一烈之閭)'라고 되어 있다. 송제는 무관으로 명종년간에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유칙, 호는 해와,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26년(1593) 강진군수로 재직시 호서로 격문을 보내 병사 200을 인솔하고 절도사 황진의 막하로 들어가 성주전투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이때 공은 적의 기세로 미루어 반드시 적이 진주에 침공할 것을 예측하고 여러 창의사에게 건의하여 복수장 고종후, 해미현감 정명세와 함께 진주에 입성하여 수성하였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왜적에게 포박당한 공은 꿇어 앉히려는 적장에게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무릎을 굽힐 수는 없다'하고 호령하며 항거하다 마침내 목숨을 잃으니 왜적도 감탄하고, 그의 시체를 정중히 매장한 후 '조선의사송제지시'라 쓴 나무 표식을 세웠다고 한다. 때는 선조 26년(1593)이었고, 정조 때 호조참의를 추증하고 쌍충일렬지려라는 정문도 세웠다. 송덕일은 앞의 송제의 조카로 무관이며, 자는 치원, 호는 조은이다, 명종년간에 숙부 송제와 같은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예에 뛰어나 선조 18년(1585) 무과에 장원하여 임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첨정으로 임금의 가마를 용만에 호종하니 호위장군의 호와 함께 은대를 하사받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에 임명된 즉시 이순신 막하로 달려가 장선사겸주사전부장으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부녕부사가 되었다. 부녕부사 재임중 여진의 침입을 받자 정병 7백명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나 부임전에 여진의 잔당 고면을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Slide25: 송씨 쌍충정려 쌍충각은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宋大立)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송심(宋諶)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 ~ 1597)은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간(侃)의 6세손으로 1594년(선조 27)의 임진왜란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생몰년미상)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향인 흥양(동강면 첨산)에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Slide26: 송씨 쌍충정려 쌍충각은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宋大立)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송심(宋諶)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 ~ 1597)은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간(侃)의 6세손으로 1594년(선조 27)의 임진왜란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생몰년미상)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향인 흥양(동강면 첨산)에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송심(1590 ~ 1637)은 부친의 뒤를 이어 1614년 무과에 급제하여 홍원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항의 휘하에서 분전 끝에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 부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쌍충정려로 포상하고, 대립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심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인조 22년(1644)에 명정받은 명정판액 2매와 1915년에 기우만이 찬한 중수기가 있다. Slide27: 서동사 - 서동사는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1405 ~ 1480)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 ~ 1598), 송심(宋諶·1590 ~ 1637), 송순례(宋純禮·1528 ~ 1597), 송희립(宋希立·1553 ~ 1623), 송건(宋建·1558 ~ 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 ~ 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Slide28: 서동사 서동사는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1405 ~ 1480)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 ~ 1598), 송심(宋諶·1590 ~ 1637), 송순례(宋純禮·1528 ~ 1597), 송희립(宋希立·1553 ~ 1623), 송건(宋建·1558 ~ 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 ~ 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이 사우는 정조 9년(1785) 최초 건립 당시 여산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유씨 유탁(1311 ~ 1371), 영광정씨 정연희(1566 ~ 1635)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되어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다. 10여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였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류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되었다. 정조 20년(1796)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다. 순조 1년(180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하여 일문 육충사로 불리었다. 순조 33년(1833) 송상보(1564 ~ 1597), 송득운(1570 ~ 1633), 송석룡(1614 ~ 1733)을 추배하였고, 헌종 12년(1846)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하였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하였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모양이나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현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薺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1569 ~ 1629), 송진부(1569 ~ 1597)를 추배하였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룡,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신실(神室)인 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이밖에 창효사, 양평문,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Slide29: 신여량장군정려 신여량(申汝樑)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53년(영조 29)에 명정(命旌)을 받아 유허지에 건립된 것이다. 신여량(1564 ~ 1606)은 고령신씨 고흥입향조인 석(碩)의 6세손으로 부 홍해(弘海)와 모 흥덕장씨(興德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봉헌(鳳軒)으로 15세때 부를 16세때 모를 여의고 4년간 시묘를 살았다. Slide30: 운대리 도요지 이곳은 폐교된 운대초등학교 남쪽에 있는 2개의 골짜기로 가마터는 주로 두원천 부근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운곡마을 주변에 가장 많다. 고려초기 청자와 조선초기 분청자를 만들던 가마터 30여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분청자는 대규모로 오랫동안 만들어져 분청자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포 상황은 운대리 점골에 청자가마터 2기와 분청자가마터 3기, 상대마을 뒷골에 청자가마터 2기와 분청자가마터 1기, 상대마을 장자수냉골에 분청자가마터 1기, 운곡마을 참사골에서 상대마을 입구까지 청자가마터 1기와 분청자가마터 10기, 중사들 주변 산에 분청자가마터 8기, 중대마을 북쪽에 청자가마터 1기, 대절에 분청자가마터 1기 등이 있다. 청자 가마터에는 청자와 흑자, 녹청자 등의 자기류와 갑발과 갑발받침, 도지미 등의 가마 도구가 출토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청자는 대접과 접시, 완, 종지 등 작은 그릇인데 비해 흑자는 항아리와 병, 주전자, 발 등 큰 그릇이 많아 그 쓰임새에 따라 그릇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바탕 흙은 대부분 치밀하지 않고 기포(氣泡)가 많으며, 유약은 얇게 발라져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 투명유가 많다. 흑자는 바탕 흙은 짙은 회색과 흑회색을 띠며 기포가 많고, 유약은 암갈색과 흑갈색유를 그릇 전체에 시유하였다. Slide31: 월정리 해안방풍림 - 해안 방풍림대는 해발 349m되는 망주산의 남쪽 기슭에 터를 잡고 있는 월정리 선정마을 해안에 조성되고 있으며 길이 400여m, 너비는 25m에 이르고 있다. 해안 방풍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의 종류와 수량음 다음과 같다. 이팝나무(Chionanthus retusus) : 50그루 팽나무(Celtis Chionanthus retusus) : 27그루 검팽나무(Celtis choseniana) : 24그루 사철나무(Euonymus japonicus) : 21그루 느티나무(Zelkova serrata) : 4그루 곰솔(해송)(Pinus thunbergii) : 5그루 상수리나무(Quercus acutissima : 2그루 쉬나무(Evodia daniellii) : 2그루 감나무(Diospyros kaki) : 1그루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var·japonica) : 1그루 Slide32: 쌍충사 - 충열공 이대원(忠烈公 李大源)과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을 배향한 사우이다. 이대원(1566 ~ 1587)은 자는 호연(浩然)이고 함평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남보다 뛰어나 18세때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관이 되었으며, 이어 녹도만호에 부임하였다. 이대원장군은 비록 젊은 나이였으나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자 즉시 출동하여 왜적과 싸워 적장을 포로로 잡아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보고하였다. Slide33: 여도진 성지 여도진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官)5포(浦) 가운데 하나의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Slide34: 여도진 성지 여도진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官)5포(浦) 가운데 하나의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여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고 있었으며(임진왜란중에는 종9품관인 권관이 주둔했음), 견고한 방어성막關?진성(鎭城)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석성의 일부만 남아있다. 남쪽으로 팔영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이곳은 그 전방에 원주도(元 珠島),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牛毛島)·계도(鷄島), 그리고 동쪽으로 항도(項島)에 둘러쌓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이곳에 수군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알 수 없다. 수군제도가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였으니 《세종실록지리지》에 반영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현재는 함평관내)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都萬戶營)을 설치하였다. 좌도 도만호영은 고흥 여도에 있었고, 우도 도만호영은 무안 원포(垣浦, 현재의 해제면)에 있었다. 이 때 여도의 전라좌도수군 도만호영에서는 내례(內禮, 여수), 돌산(突山, 여수), 축두(築頭, 고흥), 녹도(鹿島, 고흥), 회령포(會寧浦, 장흥), 마도(馬島, 강진), 달량(達梁, 해남), 어란(於蘭, 해남) 등 8개소의 수군만호영을 통할지휘하는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세조때 개편된 진관체제하에서 여도진은 도만호영에서 만호영으로 격하, 같은 고흥반도에 위치한 사도진(蛇渡鎭)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예하에 귀속된 후부터 큰 변화없이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란 기간중 여도진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의 지휘하에 해전에 참전,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대한 기록이 《이충무공전서》와 《난중일기》에 자세하다. 한편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에 축성된 것으로서 그 둘레가 1,320자(尺), 높이가 15자이었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1991년 목포대 박물관이 낸 『고흥군의 문화유적』에 나타난 조사결과를 보면, 성벽의 현존상태는 남벽이 길이 약200m에 높이가 60 ~ 150cm, 서벽의 경우는 약95m의 길이에 높이가 약 180cm 정도의 규모라고 한다. 그리고 북벽의 길이가 약 195m, 동벽이 약 110m이지만 사실상 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성남북 양쪽에는 문지(門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진성의 복원이 이루어질 경우 중요한 역사유적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Slide35: 대성사 상림마을 오무산(鰲舞山) 북쪽에 위치한 대성사는 고종 8년(1871) 공자(孔子)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던 사우이다. 이곳에 세워진 계기는 공자의 66대손인 가암(可岩) 공혜종이 임란때 화를 피해서 경남 하동으로부터 상림리 상송정 마을로 입향한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이 마을에 세거지를 이룬 공씨(孔氏)는 항상 성현 조상인 공자를 모시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한다. 이러던 중 공혜종의 9대 손인 공인두가 1870년 중국 산동성 곡부에 가서 성상 1매를 얻어 귀국하자 이에 상림에 거주하는 공씨 문중(孔氏門中)에서 비용을 마련하여이듬해인 고종 8년(1871) 오무산 남쪽에 별묘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후 1924년에 풍수지리설에 현 소재지가 명당이라는 의견에 따라 관내 유림과 후손 등에 의해 오무산 북쪽으로 이전 건축함과아울러 대성사라 이름하였다. 현재 신실(神室)인 공자묘(孔子廟)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중국 곡부에서 가져온 영정(가로 64cm, 세로 90cm)과 1970년대초 영정의 퇴락으로 다시 모사한 새로운 영정(가로 54cm, 세로 84cm)이 보존되어 있으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에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Slide36: 수도암 무루전 수도암의 초창은 고려시대에 명승 도희가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19년(1370) 영허(暎虛)가 중수했다. 본 건물은 조선 중종 12년(1517)에 화주 인종 스님과 도목 응문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수는 광해군 9년(1617), 순조 14년(1814), 1910년에 걸쳐 하였으며 단청은 1977년에 하였다. 운암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도암의 여러 전각 중 하나이다. Slide37: 본래의 이름은 영아문(瀛衙門) 남휘루라고 하였다 한다.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현종 8년(1667)에 현감 안책(安策)이 건립하였다. 원래는 관아(官衙)의 문루(門樓)로 고흥아문(高興衙門) 앞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흥양현의 아문을 열고 닫을때 북을 쳐서 알리는 누각이며 또 예로부터 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을 비롯한 관가사람들이나 이웃 고을에서 글쓴이들이 찾아와 즐겨놀던 곳이기도 하다. 구전에 의하면 「남휘루」2단 현판 3자를 새기는데 황소 한 마리를 보식하면서 1개월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한다 Slide38: 상림리 삼층석탑 이 석탑은 원래 현위치에서 약 2 ~ 3km 떨어져 있는 풍양면 상림리 577번지 내의 야산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말기에 현 풍앙면사무소로 이전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Slide39: 신호리 석주 이 석당간은 현재 넓은 들판 가운데 있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탑동' 또는 '탑성동'이라 하고 있다. 또 마을에서 구전되기로는 백제때 '한자사(寒子寺)' 또는 '한사(寒寺)로 불리어져 왔다고 한다. 현재 이 유적은 마을에서 석당간 또는 탑이라 부르고 있다. Slide40: 금강죽봉 도화면 지죽리 뒷부분 산정상에 마치 왕대나무가 솟아 하늘을 찌를듯한 암벽이 있어 금강죽봉이라 하며 유람선을 이용하여야 한다. Slide41: 적대봉 물만내 - 금산면 오천리 적대봉 아래(해발 592m)에 위치한 물만내는 폭 5-10m, 길이 500여m의 암반위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면서 깊은 웅덩이와 아름다운 폭포를 이루고,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42: 활개바위 - 도화면 발포리 발포 앞바다 가운데 15리쯤에 있으며 발포를 밝개라 하였으므로 밝개가 바뀌어 활개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이는 '활개'라는 것은 '활개치다'는 말과 함께 성행위를 뜻하고 바다 가운데 우뚝솟은 두 개의 바위중 하나는 '000'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구멍이 뚫려 있으므로 활개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Slide43: 마침멀 - 봉래면 예내리 해안에 물위로 사자가 달리는 형상을 하고있어 '사자바위'라고 불리워지며 우주센타가 건설될 봉래면 하반마을에서 해로 2㎞지점에 있는 기암괴석으로 유람선을 이용하여야 하며, 2005년 완공될 우주센타 인근에 있어 앞으로 우주센타와 연계되는 관광코스로 주목받을 곳이다. Slide44: 꼭두녀 - 봉래면 외초리 해안에 우뚝서 있으며 옛날 곡식을 갈던 멧돌 손잡이가 꼭두처럼 생겼다고 해서 '꼭두녀'라 불렀다 한다. 바다낚시 장소로 각광을 받고있어 매년 많은 낚시꾼이 찾아오는 곳이며 우주센타가 건설될 인근에 위치해 있어 연계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을 곳이다. Slide45: 소록도 중앙공원 전국적으로 보기드문 공원이나 한센병 환자가 집단 정착하여 요양하는 곳으로 세계속의 해양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중이다. 녹동에서 1㎞가 채 안되는곳에 있는 섬으로 섬의모양이 어린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르며 섬의 길이는 14㎞,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5배되는 작은섬이다. 특히 중앙공원은 황금편백, 실편백나무 등으로 잘 가꾸어져 있고 공원 곳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나환자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가 유명하다. 1916년 이곳에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한 이후 이제는 소록도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아우린다면 끝없는 비탄과 좌절의 땅이 아닌 희망의 섬으로 우리앞에 다가올 것이다. ※녹동항-소록도-금산(거금도) 연륙 연도교 가설중 Slide46: 용바위터 영남면 우천리 해안의 반석과 암벽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먼 옛날 남해바다의 해룡이 하늘로 승천할 때 이곳 암벽을 타고 기어 올랐다하여 그 자국이 너무도 뚜렷하게 남아있어 보는이로부터 신기함을 자아내게하며 지금도 입시생이나 고시생을 둔 부모들이 방문하여 촛불을 켜고 공을 드리는 분들이 많아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고, 주변이 넓은 반석으로 이루어져 단체나 가족단위 나들이 장소로, 또는 주변전체가 갯바위 낚시터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Slide47: 봉래사 - 봉래면 신금리 덕암산(德巖山)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松廣寺) 승려 주판암(朱判岩)이 1935년 봉래면 덕암산 아래에 초가 3칸을 건립하여 송광사 승려 이명송 수인(李明松守寅)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비롯되어졌다. 이명송수인이 초벽만 발라진 초가 3칸을 완성하였다. 1938년 여름에 법당 4칸을 창건하여 비로소 신흥암이라 하였다. Slide48: 팔영산(八影山) - 팔영산은 높이 608.6m로 전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스릴 넘치는 산행을 즐길수 있는 곳으로 산자락 아래 징검다리처럼 솟은 섬들이 펼쳐진 다도해의 풍정을 감상하기에 둘도없이 좋은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한 중국의 위왕이 이산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고 신하들이 조선의 고흥땅에서 이 산을 발견한 것이 그 이름의 유래라고 한다. 산은 그렇게 높은편은 아니지만 산세가 험준하고 변화 무쌍하여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길수 있다. 위험한 곳에는 철계단과 쇠줄이 설치되어 있어 별다른 준비없이도 산행에 나설수 있는 가벼운 암릉산행지다.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4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던 능가사가 있다. ※ 1봉(유영봉), 2봉(성주봉), 3봉(생활봉), 4봉(사자봉), 5봉(오노봉), 6봉(두류봉), 7봉(칠성봉), 8봉(적취봉) Slide49: 마복산(馬伏山) - 마복산은 높이 539m로 말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마복산의 산등성이에는 수많은 지릉이 흘러내리고 그 지릉마다 바위꽃이 활짝피어 있어 마치 금강산이나 설악산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이러한 경관 때문에 마복산은 소개골산(小皆骨山)이라 불리기다 한다. 마복산이 지닌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다도해 전경이다. 산 남쪽에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아름다운 곳, 산등성이에 올라 푸른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한 올망졸망한 섬들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그 사이사이 들어앉은 포구를 바라보노라면 보는 이마저도 바다에 떠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Slide50: 천등산(天燈山) - 천등산은 높이 550m로 바다로 열린 산이다. 고흥반도 최남단에 솟은 이 바위산은 한때 수군만호가 지킨 조운(漕運)의 경유항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한 어항으로 풍남항을 굽어보며 다도해 여러섬을 호령하듯 솟아있다. 천등산은 올라가 보아야 그 진가를 알수 있다. 아래에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바위산으로 뭉뚱그려 보이지만 올라가 보면 암릉들이 세밀하게 흩어지고 갈라져 새로운 흥분을 야기한다. 봉우리가 하늘에 닿는다 해서 '天燈'이라고도 하고 금탑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들이 있었을 옛날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천개의 등불츨 바쳤다는 설과 금탑사 스님들이 도를 닦으려고 많이 올라 밤이면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해서 '天燈'이라 했다고도 한다. 천등산 정상에는 철쭉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을 비롯한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천등산 동쪽 산허리에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금탑사와 이 사찰을 중심으로 비자나무숲이 형성되어 있다. Slide51: 적대봉(績臺峰) - 적대봉은 높이 592m로 고흥군 금산면(金山面) 거금도(居金島)에 솟아 있는 적대봉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안에 큰 금액이 뻗어 있어 거금도라 불린다는 이 섬은 조선중기의 문헌에는 '거억금?巨億今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적대봉 정상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봉수대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남한에서 거의 유일한 원형 봉수대로 알려져 있는 적대봉 봉수대는 둘레 약 34m, 직경 약 7m로 경남의 남대천 봉수대(지방문화재 제147호)와 거의 비슷한 규모다. 적대봉의 주변의 해안경관도 뛰어나다. 섬의 오천리는 해안선을 따라 조약돌이 널려있는 등 독특한 풍광을 보여주고 은빛백사장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Slide52: 운람산(雲嵐山) - 운람산은 높이 487m로 두원면과 포두면의 경계에 있다. 산이 높이 솟아 구름같은 기운이 산을 감싸고 있다하여 운람산이라 부른다. 골짜기에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산에서 금석병용시대의 동검, 동추 등이 발굴되었다. 옛 흥양지에는 흥양현 북쪽 15리에 있고 이 산에 죽사(竹寺), 은석사(隱寂寺), 중흥사(中興寺)가 이어져 내려왔었으며 용은사(龍隱寺)라는 말사(末寺)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수도암만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조선말기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이 흥양현감으로 재임시 이곳 운람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사실이 기우제문과 함께 전하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운암산(雲岩山)으로 표시되어 있고, 고흥 향토기록에는 이산을 일명 모악산(母岳山)으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Slide53: 봉래산(蓬萊山) - 봉래산은 높이 391m로 코스가 완만하여 가족단위 등반이 가능하고 정상에 올라가면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과 인근 화정면 선죽도를 가까이 함께 볼수 있다. 하늘을 찌를 듯 군락을 이루고 있는 80년 이상된 삼나무 편백 3만주가 울창한 숲을 형성하여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보는이로 하여금 숲이 주는 편안함과 자연에 도취되어 감탄을 자아낼 정도이며, 국내 대표적 희귀 야생화인 복수초(福壽草)의 대규모 자생 군락지가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며, 이승의 경치에 매혹되 승천시기를 놓쳐 소나무로 환생했다는 전설을 가진 100년생 추청된 신비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앞으로 우주센타 건립이 본격화되면 삼림욕장 등 휴식공간으로 개발할 계획이어서 우주센타와 함께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것이 확실하다. Slide54: Slide55: Slide56: 발포해수욕장 신경통,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는 모래찜질용 탕사가 길게 걸쳐 있으며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다. 주변에 가볼만한 곳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1580년(36세) 발포 만호로 첫부임하여 18개월간 재임했던 역사 유적지인 충무사와 백로 왜가리 도래지(기념물 제33호)가 있다. Slide57: 덕흥해수욕장 - 500여 그루의 송림과 주변의 기암괴석 등 해안경관이 수려하며 간조시에도 물이 깨끗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수심이 낮아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당하고 주변에서 갯바위 낚시도 즐길 수 있으며 연륙교 준공으로 교통이 편리하다. Slide58: 풍류해수욕장 고흥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정도 가다가 두원 대전 해수욕장을 못가서 좌측으로 고흥만간척사업소 현장 이정표와 함께 좌회전하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작고 아담한 풍류해수욕장을 발견할 수 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간조시 갯뻘에서는 가족과 함께 여러종류의 조개를 잡을수 있어 가족단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59: 소록도해수욕장 - 녹동에서 1㎞가 채 안되는 곳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어린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르며 섬의 동쪽에 소록도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경치가 뛰어나고 기후가 따뜻하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고운 모래사장은 이국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평균 수심은 1.5~2.5m이다. 이곳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완벽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으며 섬내에서의 숙박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녹동항에 있는 숙박업소를 이용하여야 한다. Slide60: 금장해수욕장 - 해수욕장 전체가 자갈로 이루어졌고 울창한 소나무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족단위 피서객 또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1.5㎞의 경사가 완만하고 아담한 해수욕장 앞으로는 수평선이 쭉 펼쳐져 있어 가슴이 확트이는 곳이다. 시원한 해풍과 어울어진 시골의 정겨움까지 느낄수 있는 포근한 곳이다. Slide61: 고라금해수욕장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 썰물땐 갯벌에 나가 조개나 소라를 주울 수 있어 해수욕의 또다른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고라금 해수욕장은 정면으로 장흥 관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보이고 주위 경관이 탁 트여 한 눈에 들어와 눈을 즐겁게 하고 주위엔 낚시터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Slide62: 남성해수욕장 Slide63: 팔영산 휴양림 - 해발 608m의 팔영산은 8개의 아름다운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일렬로 이어져 있는 도립공원으로 휴양림은 동쪽계곡에 있다. 휴양림 뒤쪽의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여자만과 다도해, 일출의 장관을 볼수 있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고로쇠나무 등 참나무류가 주를 이루는 천연림으로 고라니, 산토끼, 꿩, 참새, 노루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야영장, 물놀이터 등의 휴양시설과, 평행봉 등 16종의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능가사에서 흔들바위를 지나 제1봉부터 제8봉을 거쳐 능가사로 돌아오는 등산로와 휴양림에서 출발하여 제1봉부터 제8봉을 지나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등산로가 있다. 주변에 신라의 원효가 창건한 고찰인 금탑사와 도 문화재인 능가사를 비롯, 용바위, 남열해수욕장, 유청신피난굴, 여호바다, 강산호 낚시터, 발포 왜가리 도래지, 나로도 난대림,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등 관광지가 있다. Slide64: 유자공원 고흥과 녹동사이 국도변(풍양면 한동리)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숲을 이루고 있는 유자공원에 오시면 늦가을 매혹적인 유자향기를 만끽하면서 공원 산책로를 따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고 결혼 야외촬영, 가족․친구들과 기념사진도 품위있고 멋있게 찍을 수 있다. 유자공원 특산품 전시판매장에 오시면 고흥 유자 재배의 역사, 특성, 약리효과 등 고흥유자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유자제품으로 생과, 유자쥬스, 유자청 등 가공제품을 비롯한 고흥지역의 우수한 농산물을 싼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 유자공원 특산품 전시판매장(061-832-1656) Slide65: 과역리 민등지석묘군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게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축조되는 유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석묘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 요령성과 일본의 구주지방에도 분포하나 우리나라가 중심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무덤방(石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卓子式)과 지하에 있는 것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하에 있는 것은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碁盤式)과 없는 것(蓋石式)이 있는 것이많다. Slide66: 과역리 민등 지석묘 과역면소재지에서 벌교쪽으로 1km 떨어진 나즈막한 고개마루를 이루는 산기슭하의 구릉에 5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민등마을의 동북쪽으로 15호 국도 사이이다. 점암 저수지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세장한 계곡평지의 북쪽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주변에는 지석묘들이 6개 군 150여 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들은 산기슭의 구릉상에 56기가 구릉방향 즉 동서방향으로 50여m, 남북으로 35m의 타원형을 이루며 군집되어 있다. 지석묘의 군집 배열은 동서로 2열 정도 뚜렷하나 전체적으로는 무질서한 편이다. 지석묘의 규모는 길이가 400cm 이상이 3기이고, 300cm 이상도 5기밖에 안되어 200 ~ 300cm가 주를 이루고 있다. 길이 150m 미만도 16기나 되어 상당수는 파괴된 지석묘의 상석으로 생각된다. 두께도 100cm 이상이 7기이며, 대부분 60 ~80cm가 많다, 지석묘 중 규모가 큰 것은 군집열의 가운데에 위치하며, 가장 큰 것은 길이 540cm, 너비 250cm, 두께 130cm로 약 35톤 정도이다, 이 지석묘군은 일부 파괴되어 있지만 비교적 원형이 남아있는 것으로 50여기 이상이 군집된 곳이다. Slide67: 도천리 고인돌 도천리 지석묘군은 월악산 줄기나 남서로 뻗어 내리면서 나즈막한 구릉상을 이루고 있는데, 이 구릉상에 두 개군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15호 국도변에 있는 과역리 민등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월악마을 진입로를 따라 200m 떨어진 고개마루 정상부에 해당한다. 지석묘들은 두 개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 있는 것은 원래 13기였으나 지금은 8기만 남아있다. 이 지석묘군의 가장 북쪽에 비교적 큰 상석 1기가 있다. 그 크기는 길이 280cm, 너비 235cm, 두께 215cm로 구형(球形)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상석은 묘역을 상징하는 지석묘로 생각된다. 이 지석묘의 남쪽에 있는 것들은 길이 100 ~ 200cm의 소형들로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파괴된 것들도 있다. 이 지석묘 군집과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석묘군은 37기가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군의 배치는 구릉능선을 따라 대체로 4열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큰 것들은 열의 가운데에 분포되어 있다. 지석묘의 크기는 300cm 이상이 2기이고, 200 ~ 300cm가 17기로 소형들이 대부분이다. 두께에서도 100cm 이상이 5기 정도이고, 70cm 미만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석묘들이 땅에 밀착되어 있으나 받침돌이 드러난 것은 두께가 70cm 이상의 지석묘 12기에서 확인되었다. 이 지석묘군 중 남쪽에 있는 8기는 고흥 ~ 벌교간 국도확장 공사로 발굴 대상에 포함되어 있어, 발굴 후 인근에 복원하여 보존할 계획이다. 이 지석묘군 주변에서 반월형 식도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또 백제토기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Slide68: 도천리 지석묘군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Slide69: 중산 고인돌 중산리 지석묘군은 천봉산(千鳳山)의 서남향으로 뻗은 줄기가 득량만과 만나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숲속에 대부분 있으며, 일부는 밭과 민묘, 주위에 도괴된 채 있는 것도 있다. 중산마을의 동쪽 산기슭으로 중산재 동남쪽 기슭으로 득량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40여 기가 산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조그마한 도랑을 경계로 한 그 남쪽에 5기, 북쪽에 5기와 선돌처럼 세원진 지석묘 1기가 있다. 이 선돌같은 지석묘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선돌백이'라 부르고 있다. 지석묘들은 규모가 큰 것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받침돌이 고인 것은 15기 정도이고, 땅에 밀착되어 받침돌의 유무를 알 수 없는 것이 26기, 덮개돌(上石) 밑에 무덤방을 덮은 뚜껑돌(蓋石)이 드러나 있는 것 6기 등이다. 규모가 큰 지석묘는 길이가 550cm, 너비 460cm, 두께 90cm 크기의 대형 덮개돌 밑에 받침돌 4개가 고이고 있어 그 하부가 들여다 보인다. 또 다른 것은 길이 500cm, 너비 210cm, 두께 120cm 크기의 덮개돌 밑에 받침돌 4개가 고이고 있다. 이처럼 길이가 4 ~ 5m나 되는 대형 지석묘들은 받침돌이 4개 정도 고인 남방식 지석묘이다. Slide70: 중산리 지석묘군 Slide71: 유둔 고인돌 유둔리 덕암 지석묘는 동강면소재지의 남쪽에 있는 구릉상에 있다. 이곳은 유둔리 성안마을의 진산인 표고 100m의 야산이 동진하여 덕암마을의 북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좁고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지석묘는 덕암마을과 15호선 국도의 중간쯤의 구릉 정상부에 약6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구릉의 남쪽은 좁은 계곡평지가, 북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이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평지이다. 이 평지를 중심으로 하여 약 180여 기의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의 하나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암 지석묘는 구릉의 방향과 같이 북동 ~ 남서방향으로 수열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규모는 대개 200 ~ 300cm 내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석묘의 상석이 땅에 밀착된 것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받침돌이 고인 것과 상석 아래 석실의 일부에 잡석이 채워진 것도 있다. 그리고 파괴된 상석이 겹쳐진 것도 있다. 이 지석묘의 가운데에 선돌(立石) 1기가 세워져 있다. 이 선돌은 높이 380cm, 너비 200cm, 두께 60cm로 규모면에서 초대형에 속한다. 지석묘들은 선돌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에워싸인 듯이 군집되어 있다. 덕암 지석묘군은 60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초대형 군집군이며, 선돌이 지석묘 축조시에 세워진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하나의 거석문화로 공존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지석묘 중 대표적인 지석묘군의 하나로,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Slide72: 동강면 유둔리 덕암 지석묘군 Slide73: 흥덕사 고흥의 관문이라 할 첨산(尖山; 일명 필봉) 아래에 있다. 지지류(地志類) 등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1966년 고흥향교에서 간행한 고흥군지(高興郡誌)에 첨산암만이 나타난다. 1986년에 세운 첨산흥덕사적비에는 금지연화(金池蓮華)의 명지에 불도장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영조연간(영조52년. 1776)에 첨산 북방중턱에 낙안사(樂安寺), 남방중턱에 흥양사(興陽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 흥덕사는 1929년에 기불대사란 분이 초가로 지어 석로암(石老庵)이라 하다가 1962년 첨산사(尖山寺)로 개칭하고 1973년에 확장하면서 극락전을 신축하고 사명을 흥덕사라 했다고 한다. Slide74: 수도암 두원면 운대리 운곡(雲谷)의 운암산(雲嵐山)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 명승(名僧) 도희(道喜)가 창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영허(暎虛)가 중수했다. 조선시대에 3~4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중종(中宗) 12년(1517) 화주(化主)인 인종별좌(印宗別座)가 나한전(羅漢殿: 무루전「無漏殿」)을 건립하였다. 설암추붕이 수도암에 와서 칠언시인 모악산 수도암(募岳山 修道庵)을 지어 남겼다. 숙종 25년(1699) 설읍(雪邑)에 거주하는 신자(信者) 이공(李公)과 이란(二難) 양인이 금생(今生)에 복전(福田)을 심어 내세(來世)에 두율정토(兜率淨土)에의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량(佛糧)을 시납하기로 하였다. 또한 철종 11년(1860) 3월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정화(三尊幀畵)가 조성되어 봉안되었다. 왜정시대인 1933년경 리산․최유일(彖山․崔裕一)이 주지직을 맡았는데, 그 이후로 사찰면모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Slide75: 능가사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 아래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찰. 신라 눌지왕(訥祗王) 원년(416)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빙성은 의문. 팔영산 중턱에 보현암(普賢庵)이 창건되어(아도화상이 포교를 위하여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 뒤에 보현사로, 이 보현사가 뒤에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 사적비(楞伽寺 事蹟碑)에서 밝히고 있으나 지리지류(地理誌類)에서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해 불에 타 버려 폐찰. 인조(仁祖) 22년 황명숭정갑신(皇明崇禎甲申 : 1644) 정현대사(正玄大師)가 하안거(夏安居, 4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 90일 동안 승려들과 방에 모여 수도함)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서 '장부(丈夫)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 어려우므로 마땅히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종풍(宗風)을 홍포(弘布) 하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이에 정현대사는 광희사(廣熙師)와 함께 산을 살펴보게 되었다. 산의 남쪽에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요사채․불상․탱화․종각․목어각 등 불사를 함으로써 정현이 창건주가 되어 능가사를 시창하였던 것이다. 정현대사가 멸도(滅道 :入寂)하게 되자 그의 제자 민정(敏淨), 의헌(義軒), 상기(尙機) 등이 스승의 유지를 좇아 문(門)의 요사채를 단청 불사함으로써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일련의 사찰 당우 불사가 이루어지자 사승(寺僧) 수명(透明)이 능가사의 사적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천리를 달려 통정대부홍문관 부제학 (弘文館 副提學) 오수채(吳遂采)에게 청문하여 숙종 16년(1690) 능가사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Slide76: 송광암 - 금산면 어전리의 용두봉산 동쪽 중턱에 있는 암자인데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그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사찰에서 근래에 정리한 금산송광암연혁(錦山松廣庵沿革)에는 고려 신종(神宗) 3년(1200)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선조(宣祖) 3년(1570) 선조국사가 세웠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빙성이 의심된다. 2~3차 중수를 거쳐 1748년 (건융 13무진),치찬장로(致粲長老) 4창, 1796년(건융 36 갑진) 양익비구(良益比丘) 5창, 1806년(가경 11) 양익 6창, 1956년(함풍6) 지전등천(持殿燈天) 내주봉실(來住奉實) 공양주 이원(理元)이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상량 7창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 건융년간(乾隆年間 : 英祖12, 正祖19 :1736~1795)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도(阿彌陀三尊佛圖)가 봉안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불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7차의 중수를 거쳐 1954년에 김원광(金圓光)․최봉암(崔鳳岩) 주지 스님이 8차의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최근 1982년 손석봉(孫石峰) 주지가 9창하고 1986년 진입도로 개설, 1989년 6월에 불사를 하였는데 크라운 제과 사장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Slide77: 금탑사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4 흥향현 불우조(佛宇條)에 사명(寺名)조차도 보이지 않던 금탑사가,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인「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전라도 권 5 하 흥양현 사찰조에 사명이 비로소 있을 뿐 아니라 대동지지(大東地志) 흥양산수조(興陽山水條)의 천등산의 세기(細記)에 신라문무왕 태봉금탑사(新羅文武王 胎封金塔寺) 기록이 별안간 나타나고 있다. 금탑사의 초창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보여진다. 임진왜란(정유재란)때 섬 오랑캐로 인해 불 타 무너졌다고 한다. 이 피해로 폐사찰이 되어 단지 1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0년(1597) 궁현․옥순대사(弓弦․玉淳大師)가 중건했다가 숙종 18년(1692) 불에 타버리고 극락전(極樂殿)만 남았다고 한다. 설암추붕(雪巖秋鵬 : 1651~1706)이 금탑사에 와서 칠언율시(七言律詩) andlt;금탑사구호(金塔寺口號)를 남겼으며 고흥 출신인 영해약탄(影海若坦; 1668~1754)도 오언시(五言詩)인 제금탑사(題金塔寺)를 지었다. Slide78: 금산 목장성 금산면 목장성은 금산의 주봉인 적대봉(積台峰 : 표고 592.2m)과 용두봉(龍頭峰 : 표고 418.6m) 사이에 거의 남북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있다. 남쪽의 어전리 금장마을에서부터 북쪽의 석정리 성치마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4.5km에 달한다. 이 성은 5만분지의 1도상에도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몇가지 전설도 구전되어 오고 있다. 거금도는 행정명으로 금산면이며, 고명은 절이도이다. 이 절이도에 목장과 목장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고흥군사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Slide79: 고흥만 방조제 고흥만 방조제는 2.873m로 확트인 바다를 조망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수 있는 최적의 코스와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고흥만 방조제 공원은 조성면적이 1ha로서 편백나무등 조경수를 식재하여 주민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80: 고흥만 방조제 공원 고흥만 방조제는 2.873m로 확트인 바다를 조망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수 있는 최적의 코스와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고흥만 방조제 공원은 조성면적이 1ha로서 편백나무등 조경수를 식재하여 주민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81: 연도교 포두면과 내나로도를 연결한 380m의 연륙교와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잇는 450m의 연도교가 개통되어 수려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의 해수욕장, 사계절 바다낚시터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Slide82: 연륙교 - 포두면과 내나로도를 연결한 380m의 연륙교와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잇는 450m의 연도교가 개통되어 수려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의 해수욕장, 사계절 바다낚시터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Slide83: 녹동항 녹동-벌교 4차로 개통, 금산 연륙교 가설과 함께 물동량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남해안의 해상 교통 요충지이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You do not have the permission to view this presentation. In order to view it, please contact the author of the presentation.
Goheung tuor anselum Download Post to : URL : Related Presentations : Share Add to Flag Embed Email Send to Blogs and Networks Add to Channel Uploaded from authorPOINT Insert YouTube videos in PowerPont slides with aS Desktop Copy embed code: (To copy code, click on the text box) Embed: URL: Thumbnail: WordPress Embed Customize Embed The presentation is successfully added In Your Favorites. Views: 261 Category: Entertainment License: All Rights Reserved Like it (0) Dislike it (0) Added: September 10, 2007 This Presentation is Public Favorites: 0 Presentation Description In Goheung, there are various space- related centers including Space Center, Space Experience Center and the Youth Space Camp, making itself a modern and sophisticated county. For that reason, Goheung is called “A place embracing the past, pres Comments Posting comment... Premium member Presentation Transcript Slide1: 정해생 60돌 합동 생신 기념 행사를 축하 드립니다 ! Slide2: Slide3: Slide4: 봉래면 상록수림 - 외나로도의 북서쪽 해안에 인접해 있으며 바로 그 남서쪽에는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위34°28′, 동경127°27′에 위치하며 난대북부에 해당된다. 평균기온 섭씨 14℃, 강수량은 1,400mm에 이르러 상록활엽수가 번성하는데 알맞는 기후조건을 이루고 있다. 난대특유의 임상을 지니고 수령 100년이상 흉고직경(胸高直徑) 1m에 이르는 동백나무 100여주, 수령 300년이상 수고 10m이상의 구실잣밤나무 300여주, 수령 50년이상 수고 8m이상의 후박나무 50여주가 임상을 표현하는 주요수종. 그밖에 황칠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보리밥나무, 자금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Slide5: Slide6: 능가사 범종 Slide7: 능가사 사적비 Slide8: 옥하리 홍교 -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여산 마을을 흐르고 있는 너비 8 ~ 9m의 고흥천 위 아래에 약 200m의 간격을 두고 2개의 홍교가 있다. 먼저 서문리다리를 보면 맨밑에 편단석을 설치한 뒤 27개의 직사각형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반원형의 홍예를 이루었는데, 한줄은 1개의 장대석을 다른 한줄은 2개의 장대석을 붙여 차례로 짜올라 갔다. Slide9: 능가사 대웅전 - 능가사는 삼국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팔영산 하단부에 있는 평지형 사찰로 일명 보현사라고도 전한다.임진왜란때소실된 것을 인조 22년(1644)에 벽천대사가 현위치에 2개 동의 사찰을 중건하여 능가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대웅전은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다. 일단의 시멘트 기단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간 거칠게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에 비하여 조그마한 기둥머리가 창방과 용머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장식한 용머리가 외 3출목, 내 4출목의 공포를 받쳐주고 있다, 살미첨차의 앙혀의 굽변은 완만한 곡면을 이루고 위로 올라갔으며 첨차의 곡면 역시 약간 경사를 두고 비스듬하게 깎았다. 중앙칸은 4분합문이며 기둥 사이 포가 3조 있으며, 협문은 2분합문으로 기둥 사이 포가 2조, 퇴간은 외여닫이문으로 주간포 1조가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겹쳐마이며 직경이 큰 서까래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조그마한 닷집이 4개의 높은 기둥에 결구되어 있으며 넓은 공간을 4개의 대량과 4개의 높은 기둥이 지지하고 있다. 내부공포는 운공형으로 조식되어 있는 살미첨차가 커다랗게 결구되어 있으며 맨밑에는 용의 몸통 부분으로 받쳐지고 있다.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되어 있는 우물천장이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창호의 무늬는 빗살무늬문을 하고 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건물 방향이 입구 때문에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나 양식면에서 귀중한 유산이라 하겠다. 건물 전체가 기울어 1999년부터 완전 해체 하여 2000년 12월 완전 복원하여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Slide10: 금탑사 극락전 - 금탑사는 고흥에서 15.5km 떨어진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금탑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유재란 때 사원 전체가 불탔으나 선조 36년(1603년) 궁현·옥순(弓弦·玉淳)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숙종 18년(1692)에 또 참화를 입고 현재는 극락전만 남아 있으며 최근에 건립한 명부전, 삼성각, 종각, 요사체 등이 있다. 극락전은 축대형식으로 쌓은 3단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Slide11: 고흥 향교 - 고흥 향교는 세종 23년(1441)에 처음 세웠으나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됨에 따라 한 때 성동촌으로 옮겼다가 숙종 21년(1695) 현 위치에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 제기고(동·서무), 교직사 등이 있으며 명륜당 좌우에 있는 은행나무는 350여 년 된 것으로 창건 당시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 명륜당, 동·서재, 내삼문, 대성전 순으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경사지 건축으로 전체적으로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동·서재와 제기고(祭器庫)는 좌우대칭의 배치를 보여준다. 대성전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높이 약90cm인 기단을 놓고 자연석 덤벙 주춧돌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2고주 5량이며 공포는 초익공양식이다. Slide12: 용산리 석조보살좌상 이 석불은 고흥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쯤 떨어진 두원면 소재지 문무정(文武亭)이 위치한 야산 구릉상에 있다. 나지막한 야산 평지에서 옛 기와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 일대에 사찰이 경영되었거나 혹은 감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북에서 약간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 석불은 대좌에 몸체가 한돌로 되었으며, 대좌 이하는 땅속에 매몰되어 자세한 형식은 알 수 없다.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쓴 상태이며 보관 하단으로 구슬 무늬로 장식된 띠를 두르고 전면 중앙에는 화불 1구가 조각되었다. Slide13: 이충무공친필첩자 이 첩자는 수군통제사 이충무공이 전시 체제하의 긴급한 상황에서 왕명에 따른 직권으로 발한 차첩문서 즉 직첩의 특이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수군 전력이 극히 약화된 정유년(1597)말 연해지역 의병장에게 공식적으로 그 지휘권을 부여함으로서 원활한 군사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첩자의 대상인물은 흥양의 의병장 신군안(申君安)이다. 자는 효원, 본관은 고령이며 중종30년(1544) 흥양에서 현감 수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Slide14: 이충무공 친필 첩자 이 첩자는 수군통제사 이충무공이 전시 체제하의 긴급한 상황에서 왕명에 따른 직권으로 발한 차첩문서 즉 직첩의 특이한 일례라 할 수 있다. 수군 전력이 극히 약화된 정유년(1597)말 연해지역 의병장에게 공식적으로 그 지휘권을 부여함막關?원활한 군사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첩자의 대상인물은 흥양의 의병장 신군안(申君安)이다. 자는 효원, 본관은 고령이며 중종30년(1544) 흥양에서 현감 수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을 지낸 다음 정유재란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바다와 육지를 전전하던 중 그해 12월 수군통제사로부터 의병장 선정의 첩지를 받았다. 그 뒤 연해지역 7읍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뒤 선조 31년(1598)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兼三道通制使差定」事今月初十日 祗受有旨內沿海」各官各義兵等當屬于卿指揮」討賊○ 겸삼도통제사차정」사금월초십일 지수유지내연해」각관각의병등당속우경지휘」토적○ 有旨叱分不喩沿海各官大小義兵○道○○○○○○南康津」長興寶城之賊多數斬○而興陽」 유지질분불유연해각관대소의병○도○○○○○○남강진」장흥보성지적다수참○이흥양」 人段今至四朔一不○告意謂無遺」附賊爲如平今見告目內辭緣則極」爲可嘉爲乎○用良義○ 인단금지사삭일불○고의위무유」부적위여평금견고목내사연칙극」위가가위호○용양의○ 將差定」爲去乎管下募聚之人協心同力無」遺剿殺登時馭爲平乎矣所率」軍人中如有○從令 장차정」위거호관하모취지인협심동력무」유초살등시어위평호의소솔」군인중여유○종령 者○去等尤」甚一人行刑報母失○機向事」合下仰照給施行須至帖者」右下興陽副護君申君 자○거등우」심일인행형보모실○기향사」합하앙조급시행수지첩자」우하흥양부호군신군 安准此」萬曆二十五年十二月十四日在寶花島帖子手決 안준차」만력이십오년십이월십사일재보화도첩자수결 첩자의 내용은 ① 연해지역 각관과 현지 의병에 대한 지휘 통솔권이 수군통제사에게 주어졌다는 것 ②신군안이 보낸 의병활동 결과보고에 치하한다는 것 ③ 의병장에 임명하니 더욱 분발하여 싸우되 특히 군률을 엄격히 하라는 것, ④ 1597년 12월 고하도에서 흥양의 부호군 신군안에게 차첩한다는 것 등이다. 이 첩자는 이충무공의 통제사 재임 중 발한 친필 의병장 차첩으로서는 현재까지 유일한 문서이다, 임진란때 수군전력 증강에 연해지역의 의병운동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해 준 첩자로 임진 의병사와 해전사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Slide15: 류몽인 위성공신 교서 - 이 문서는 광해군 5년(1613) 위성공신 3등에 책훈된 한성좌윤 유몽인(柳夢寅)에게 내려진 교서로 원명은 '교갈충진성위성공신가의대부한성부좌윤영양군유몽인서'이다, 위성공신이란 임진왜란 때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 분조를 호위하고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 하여 훈적에 올린 신료들을 말한다. 1등에는 최흥원 등 10명을 '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 3등에는 유몽인 등 53명에게 '갈충진성위성공신'이란 공신호를 하사였다. 이에 의하면, 3등 공신인 유몽인에게 본인은 물론 그의 부모 처자에게도 1계가 가자되었을 뿐 아니라 노비·전결·은자·기마·표리 등이 아울러 내려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유몽인(1559 ~ 1623)은 「어우야담」의 저자로서 조선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자를 응문, 호를 어우당 또는 양재, 본관은 고흥이다. 사간을 지낸 충관의 손자이며 탱의 아들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임란 직전에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왜란 발발 직후에 돌아와 의주 행궁에서 복명한 후 세자시강원 사서로 있으면서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다. 난후에 황해도 감사, 한성부좌윤, 승정원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Slide16: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 본 사천왕상은 능가사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 안에 4구가 배치되어 있다. 1995년 8월초, 천왕문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초창연대는 1666년(현종 7)이며, 중창은 1824년(순조 24), 3창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세 번에 걸쳐 보수중창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은 1690년(숙종 16)에 세운 '능가사 사적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에 대한 시주자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비문(사적비 후면 음기(陰記) 사찰 시주자 명단편에 기록)의 일부를 보면 『天王門 化主 是閑 別座 懷益 王像(天王像) 化主 天日 沖印(천왕문 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천왕상) 화주 천일 충인)』이라 하였다. 위 내용에 의하면 천왕문 건립과 사천왕상 조성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적비의 기록대로라면 천왕문의 상량문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최초 초창연대가 1666년(현종 7)이므로 천왕상 역시 이때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Slide17: 월포농악 - 남도농악은 연행 방식, 복식, 음악성 등을 기준으로 볼 때 크게「左道굿」, 「右道굿」, 「도서해안굿」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도굿은 남도의 동북부 산간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이며, 우도굿은 남도의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Slide18: 한적들노래 - 전남의 들노래는 음악적 특성과 가창 방법으로 보아 크게 세 개의 분포권으로 구분되는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서부 평야 지역의 긴소리권, 섬진강 유역에서 여천과 고흥으로 뻗어 내린 전남 동부지역의 산아지타령권, 그리고 남해와 서남해 도서 해안 지역의 절로소리권이 그것이다. 고흥군 한적 들노래는 분포권상 산아지타령권에 속한다, Slide19: 발포 만호성 발포진성은 현재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중심으로 있다. 이 성은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5포(5관 : 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 5포 :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중 수군만호가 다스린 수군진성으로서 성종21년(1490) 축성되어 고종 31년(1894) 폐지된 조선 초기의 성이다. 또 이 성은 선조13년(1580) 이순신장군이 36세 때 발포만호로 부임해와 18개월 동안 재임했던 인연을 맺고 있다. 발포진성에 관한 기록은 『성종실록』에 보이는데 권245, 21년 경술 9월조에『축…전라도발포성주일천삼백육십척병고십삼척(築…全羅道鉢浦城周日千三百六十尺竝高十三尺)』이라 하였으며 성종21년(1490) 적양성, 지세포성, 안골포성 등과 함게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Slide20: 백로 및 왜가리 도래지 도화면 발포리는 고흥읍 소재지에서 직선거리로 약 15km 떨어진 해변마을로 이곳은 이충무공의 수군만호의 역임지로 역사적 유서가 있는 곳이다. 발포마을 동쪽 해발 70m에 야산이 있는데 이곳은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와 천연생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 잡목수림에 수백년 전부터 왜가리가 3월초부터 날아와 8월까지 살고 있으며 최근 수년전부터는 백로가 도래하여 함께 살고 있다. 느티나무와 팽나부등의 잡목 상부에 백로와 왜가리가 뒤섞여 수많은 둥지를 짓고 살고 있으며 그 수는 대략 500마리 이상으로 헤아려 진다. 이들은 낮에는 먹이를 찾아 바다와 강가로 나가며또한 백로가 들어온 뒤 부터는 왜가리가 생태적으로 그 숫자가 감소되고 있다는 주민들의 얘기다. 백로(白鷺 heron/Ardeidae) 황새목 백로과에 속하는 새의 총칭, 영어명은 일반적으로 heron이라고 하는데, 쇠백로는 egret, 일락해오라기·덤블해오라기는 bittern이라고 한다. 백로과는 15 ~ 20속 약 62종으로 분류되며, 극지를 제외한 전세계에 분포한다. 백로과는 크게 참 백로와 덤블해오라기류로 구분할 수 있다. 참 백로류는 왜가리·쇠백로·황로·횐날개해오라기·검음댕기해오라기 등의 주행성 백로류와 해오라기·붉은해오라기 등의 야행성 해오라기류, 열대 정글에 서식하는 원시적인 백로류를 포함하여 백로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덤블해오라기류는 덤블해오라기속과 알락해오라기속으로 나뉘며 뛰어난 의태행동으로 갈대밭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전체길이는 28 ~ 145cm이다. 백로류는 모두 목·다리·부리가 길고, 섭금형(涉禽型)의 몸형이다, 다만 해오라기(Nucticorax nycticorax)와 붉은해오라기(Gorsachius goisagi)는 비교적 목이 짧다. 백로류는 날 때에 긴 목을 Z자 모양으로 구부리는 특징이 있으며, 날개는 폭이 넓고 둥글며 천천히 날개를 펴서 비상한다. Slide21: 흥양현읍성 - 흥양현조 흥양읍성에는 읍성 주위 3,800척, 높이 12척, 치성 322, 옹성 2, 곡성 13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둘레 1,520척, 높이 15척이라 되어 있어 성 둘레와 성높이가 맞지 않은데 이것은 책의 편찬 당시의 척수가 틀리든지 아니면 오자로 볼 수 있겠다. 이를 영조척(31.19cm)으로 환산하면 성 주위가 약 1,215m, 높이가 약 3.7 ~ 4.7m가 된다. 그런데 현재 읍성이 많이 파손되고 민가가 들어서 있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당시 성곽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Slide22: 무열사 -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무장 진무성(陳武晟)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에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용강사는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건립되어 진무성 장군을 비롯하여 3인이 제향되었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사우 일제 철폐령에 의해 훼철당한 후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는 무열사에 진무성 장군 1인만 제향되고 영정이 있다. 진무성(1566 ~1638)장군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군 진중(陳中)의 해전에서 대공(大功)을 세운 무장(武將)으로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부사 인해의 아들로서 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자원출전 옥포·적진포(玉浦·赤珍浦)등지의 해전에서 사도첨사 김완(金浣)등과 더불어 많은 왜병을 참획하였으며, 특히 당포해전시 적선에 뛰어들어 왜병의 목을 베고 적선을 불태우는 등 이순신이 장계에 기록할 만큼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Slide23: 송씨 쌍충일렬각 -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송제(宋悌·1547 ~ 1592)와 그의 부인 열녀능성구씨(烈女綾城具氏)의 자결열행을 표창하고, 병자호란때 순절한 제(悌)의 조카인 송덕일(宋德馹·1566 ~ 1616)의 충열(忠烈)을 기리기 위해 1797(정조 21) 후손 송계필(宋啓弼)의 상소로 건립된 정려각(旌閭閣)이다. 1920년 1차 중수되었으며, 1979년 2차 보수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쌍충일열지려(雙忠一烈之閭)'라고 되어 있다. Slide24: 송씨 쌍충일렬각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송제(宋悌·1547 ~ 1592)와 그의 부인 열녀능성구씨(烈女綾城具氏)의 자결열행을 표창하고, 병자호란때 순절한 제(悌)의 조카인 송덕일(宋德馹·1566 ~ 1616)의 충열(忠烈)을 기리기 위해 1797(정조 21) 후손 송계필(宋啓弼)의 상소로 건립된 정려각(旌閭閣)이다. 1920년 1차 중수되었으며, 1979년 2차 보수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쌍충일열지려(雙忠一烈之閭)'라고 되어 있다. 송제는 무관으로 명종년간에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유칙, 호는 해와, 본관은 남양이다. 선조 26년(1593) 강진군수로 재직시 호서로 격문을 보내 병사 200을 인솔하고 절도사 황진의 막하로 들어가 성주전투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이때 공은 적의 기세로 미루어 반드시 적이 진주에 침공할 것을 예측하고 여러 창의사에게 건의하여 복수장 고종후, 해미현감 정명세와 함께 진주에 입성하여 수성하였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왜적에게 포박당한 공은 꿇어 앉히려는 적장에게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무릎을 굽힐 수는 없다'하고 호령하며 항거하다 마침내 목숨을 잃으니 왜적도 감탄하고, 그의 시체를 정중히 매장한 후 '조선의사송제지시'라 쓴 나무 표식을 세웠다고 한다. 때는 선조 26년(1593)이었고, 정조 때 호조참의를 추증하고 쌍충일렬지려라는 정문도 세웠다. 송덕일은 앞의 송제의 조카로 무관이며, 자는 치원, 호는 조은이다, 명종년간에 숙부 송제와 같은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예에 뛰어나 선조 18년(1585) 무과에 장원하여 임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첨정으로 임금의 가마를 용만에 호종하니 호위장군의 호와 함께 은대를 하사받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에 임명된 즉시 이순신 막하로 달려가 장선사겸주사전부장으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부녕부사가 되었다. 부녕부사 재임중 여진의 침입을 받자 정병 7백명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나 부임전에 여진의 잔당 고면을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Slide25: 송씨 쌍충정려 쌍충각은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宋大立)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송심(宋諶)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 ~ 1597)은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간(侃)의 6세손으로 1594년(선조 27)의 임진왜란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생몰년미상)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향인 흥양(동강면 첨산)에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Slide26: 송씨 쌍충정려 쌍충각은 마륜리 마서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宋大立)과 병자호란때 공을 세운 송심(宋諶)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 ~ 1597)은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간(侃)의 6세손으로 1594년(선조 27)의 임진왜란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希立·생몰년미상)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고향인 흥양(동강면 첨산)에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송심(1590 ~ 1637)은 부친의 뒤를 이어 1614년 무과에 급제하여 홍원현감으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항의 휘하에서 분전 끝에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 부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쌍충정려로 포상하고, 대립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심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인조 22년(1644)에 명정받은 명정판액 2매와 1915년에 기우만이 찬한 중수기가 있다. Slide27: 서동사 - 서동사는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1405 ~ 1480)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 ~ 1598), 송심(宋諶·1590 ~ 1637), 송순례(宋純禮·1528 ~ 1597), 송희립(宋希立·1553 ~ 1623), 송건(宋建·1558 ~ 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 ~ 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Slide28: 서동사 서동사는 여산송씨 충강공 송간(宋侃·1405 ~ 1480)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1550 ~ 1598), 송심(宋諶·1590 ~ 1637), 송순례(宋純禮·1528 ~ 1597), 송희립(宋希立·1553 ~ 1623), 송건(宋建·1558 ~ 1592)과 김시습(金時習·1435 ~ 1493)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이 사우는 정조 9년(1785) 최초 건립 당시 여산송씨 송간, 송대립, 송심과 고흥유씨 유탁(1311 ~ 1371), 영광정씨 정연희(1566 ~ 1635)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1782년 태학유생 한덕보가 서재 송간을 주벽으로 하는 사우 건립을 발의한데서 비롯되어 흥양유생 신응택, 정효목 등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다. 10여년이 지난 1791년 건립당시 주역이였던 정효목 신응택의 주선으로 여산송씨, 고흥류씨, 영광정씨의 분사가 합의되었다. 정조 20년(1796) 서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다. 순조 1년(180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대하여 일문 육충사로 불리었다. 순조 33년(1833) 송상보(1564 ~ 1597), 송득운(1570 ~ 1633), 송석룡(1614 ~ 1733)을 추배하였고, 헌종 12년(1846) 매월당 김시습을 봉안하였다. 1848년에는 원유들의 개호상서에 의해 「서동사」로 개칭하였고, 1868년 전국 서원훼철 때 「물훼(勿毁)」의 교지가 있었던 모양이나 이내 훼철되었다. 1956년 현위치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薺洞書院)이라 하였고 1972년에 송홍연(1569 ~ 1629), 송진부(1569 ~ 1597)를 추배하였다. 같은 경내의 창효사(1980년 건립)에는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룡,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신실(神室)인 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이밖에 창효사, 양평문, 내·외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Slide29: 신여량장군정려 신여량(申汝樑)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53년(영조 29)에 명정(命旌)을 받아 유허지에 건립된 것이다. 신여량(1564 ~ 1606)은 고령신씨 고흥입향조인 석(碩)의 6세손으로 부 홍해(弘海)와 모 흥덕장씨(興德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봉헌(鳳軒)으로 15세때 부를 16세때 모를 여의고 4년간 시묘를 살았다. Slide30: 운대리 도요지 이곳은 폐교된 운대초등학교 남쪽에 있는 2개의 골짜기로 가마터는 주로 두원천 부근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운곡마을 주변에 가장 많다. 고려초기 청자와 조선초기 분청자를 만들던 가마터 30여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분청자는 대규모로 오랫동안 만들어져 분청자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포 상황은 운대리 점골에 청자가마터 2기와 분청자가마터 3기, 상대마을 뒷골에 청자가마터 2기와 분청자가마터 1기, 상대마을 장자수냉골에 분청자가마터 1기, 운곡마을 참사골에서 상대마을 입구까지 청자가마터 1기와 분청자가마터 10기, 중사들 주변 산에 분청자가마터 8기, 중대마을 북쪽에 청자가마터 1기, 대절에 분청자가마터 1기 등이 있다. 청자 가마터에는 청자와 흑자, 녹청자 등의 자기류와 갑발과 갑발받침, 도지미 등의 가마 도구가 출토되었다, 그릇의 종류는 청자는 대접과 접시, 완, 종지 등 작은 그릇인데 비해 흑자는 항아리와 병, 주전자, 발 등 큰 그릇이 많아 그 쓰임새에 따라 그릇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바탕 흙은 대부분 치밀하지 않고 기포(氣泡)가 많으며, 유약은 얇게 발라져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 투명유가 많다. 흑자는 바탕 흙은 짙은 회색과 흑회색을 띠며 기포가 많고, 유약은 암갈색과 흑갈색유를 그릇 전체에 시유하였다. Slide31: 월정리 해안방풍림 - 해안 방풍림대는 해발 349m되는 망주산의 남쪽 기슭에 터를 잡고 있는 월정리 선정마을 해안에 조성되고 있으며 길이 400여m, 너비는 25m에 이르고 있다. 해안 방풍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의 종류와 수량음 다음과 같다. 이팝나무(Chionanthus retusus) : 50그루 팽나무(Celtis Chionanthus retusus) : 27그루 검팽나무(Celtis choseniana) : 24그루 사철나무(Euonymus japonicus) : 21그루 느티나무(Zelkova serrata) : 4그루 곰솔(해송)(Pinus thunbergii) : 5그루 상수리나무(Quercus acutissima : 2그루 쉬나무(Evodia daniellii) : 2그루 감나무(Diospyros kaki) : 1그루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var·japonica) : 1그루 Slide32: 쌍충사 - 충열공 이대원(忠烈公 李大源)과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을 배향한 사우이다. 이대원(1566 ~ 1587)은 자는 호연(浩然)이고 함평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남보다 뛰어나 18세때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선전관이 되었으며, 이어 녹도만호에 부임하였다. 이대원장군은 비록 젊은 나이였으나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자 즉시 출동하여 왜적과 싸워 적장을 포로로 잡아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보고하였다. Slide33: 여도진 성지 여도진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官)5포(浦) 가운데 하나의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Slide34: 여도진 성지 여도진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官)5포(浦) 가운데 하나의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여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고 있었으며(임진왜란중에는 종9품관인 권관이 주둔했음), 견고한 방어성막關?진성(鎭城)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석성의 일부만 남아있다. 남쪽으로 팔영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이곳은 그 전방에 원주도(元 珠島),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牛毛島)·계도(鷄島), 그리고 동쪽으로 항도(項島)에 둘러쌓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이곳에 수군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알 수 없다. 수군제도가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였으니 《세종실록지리지》에 반영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현재는 함평관내)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都萬戶營)을 설치하였다. 좌도 도만호영은 고흥 여도에 있었고, 우도 도만호영은 무안 원포(垣浦, 현재의 해제면)에 있었다. 이 때 여도의 전라좌도수군 도만호영에서는 내례(內禮, 여수), 돌산(突山, 여수), 축두(築頭, 고흥), 녹도(鹿島, 고흥), 회령포(會寧浦, 장흥), 마도(馬島, 강진), 달량(達梁, 해남), 어란(於蘭, 해남) 등 8개소의 수군만호영을 통할지휘하는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세조때 개편된 진관체제하에서 여도진은 도만호영에서 만호영으로 격하, 같은 고흥반도에 위치한 사도진(蛇渡鎭)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예하에 귀속된 후부터 큰 변화없이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란 기간중 여도진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의 지휘하에 해전에 참전,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대한 기록이 《이충무공전서》와 《난중일기》에 자세하다. 한편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에 축성된 것으로서 그 둘레가 1,320자(尺), 높이가 15자이었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1991년 목포대 박물관이 낸 『고흥군의 문화유적』에 나타난 조사결과를 보면, 성벽의 현존상태는 남벽이 길이 약200m에 높이가 60 ~ 150cm, 서벽의 경우는 약95m의 길이에 높이가 약 180cm 정도의 규모라고 한다. 그리고 북벽의 길이가 약 195m, 동벽이 약 110m이지만 사실상 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성남북 양쪽에는 문지(門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진성의 복원이 이루어질 경우 중요한 역사유적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Slide35: 대성사 상림마을 오무산(鰲舞山) 북쪽에 위치한 대성사는 고종 8년(1871) 공자(孔子)를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던 사우이다. 이곳에 세워진 계기는 공자의 66대손인 가암(可岩) 공혜종이 임란때 화를 피해서 경남 하동으로부터 상림리 상송정 마을로 입향한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이 마을에 세거지를 이룬 공씨(孔氏)는 항상 성현 조상인 공자를 모시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한다. 이러던 중 공혜종의 9대 손인 공인두가 1870년 중국 산동성 곡부에 가서 성상 1매를 얻어 귀국하자 이에 상림에 거주하는 공씨 문중(孔氏門中)에서 비용을 마련하여이듬해인 고종 8년(1871) 오무산 남쪽에 별묘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후 1924년에 풍수지리설에 현 소재지가 명당이라는 의견에 따라 관내 유림과 후손 등에 의해 오무산 북쪽으로 이전 건축함과아울러 대성사라 이름하였다. 현재 신실(神室)인 공자묘(孔子廟)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중국 곡부에서 가져온 영정(가로 64cm, 세로 90cm)과 1970년대초 영정의 퇴락으로 다시 모사한 새로운 영정(가로 54cm, 세로 84cm)이 보존되어 있으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에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Slide36: 수도암 무루전 수도암의 초창은 고려시대에 명승 도희가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19년(1370) 영허(暎虛)가 중수했다. 본 건물은 조선 중종 12년(1517)에 화주 인종 스님과 도목 응문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수는 광해군 9년(1617), 순조 14년(1814), 1910년에 걸쳐 하였으며 단청은 1977년에 하였다. 운암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도암의 여러 전각 중 하나이다. Slide37: 본래의 이름은 영아문(瀛衙門) 남휘루라고 하였다 한다.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현종 8년(1667)에 현감 안책(安策)이 건립하였다. 원래는 관아(官衙)의 문루(門樓)로 고흥아문(高興衙門) 앞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흥양현의 아문을 열고 닫을때 북을 쳐서 알리는 누각이며 또 예로부터 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을 비롯한 관가사람들이나 이웃 고을에서 글쓴이들이 찾아와 즐겨놀던 곳이기도 하다. 구전에 의하면 「남휘루」2단 현판 3자를 새기는데 황소 한 마리를 보식하면서 1개월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한다 Slide38: 상림리 삼층석탑 이 석탑은 원래 현위치에서 약 2 ~ 3km 떨어져 있는 풍양면 상림리 577번지 내의 야산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말기에 현 풍앙면사무소로 이전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Slide39: 신호리 석주 이 석당간은 현재 넓은 들판 가운데 있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탑동' 또는 '탑성동'이라 하고 있다. 또 마을에서 구전되기로는 백제때 '한자사(寒子寺)' 또는 '한사(寒寺)로 불리어져 왔다고 한다. 현재 이 유적은 마을에서 석당간 또는 탑이라 부르고 있다. Slide40: 금강죽봉 도화면 지죽리 뒷부분 산정상에 마치 왕대나무가 솟아 하늘을 찌를듯한 암벽이 있어 금강죽봉이라 하며 유람선을 이용하여야 한다. Slide41: 적대봉 물만내 - 금산면 오천리 적대봉 아래(해발 592m)에 위치한 물만내는 폭 5-10m, 길이 500여m의 암반위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면서 깊은 웅덩이와 아름다운 폭포를 이루고,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42: 활개바위 - 도화면 발포리 발포 앞바다 가운데 15리쯤에 있으며 발포를 밝개라 하였으므로 밝개가 바뀌어 활개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이는 '활개'라는 것은 '활개치다'는 말과 함께 성행위를 뜻하고 바다 가운데 우뚝솟은 두 개의 바위중 하나는 '000'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구멍이 뚫려 있으므로 활개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Slide43: 마침멀 - 봉래면 예내리 해안에 물위로 사자가 달리는 형상을 하고있어 '사자바위'라고 불리워지며 우주센타가 건설될 봉래면 하반마을에서 해로 2㎞지점에 있는 기암괴석으로 유람선을 이용하여야 하며, 2005년 완공될 우주센타 인근에 있어 앞으로 우주센타와 연계되는 관광코스로 주목받을 곳이다. Slide44: 꼭두녀 - 봉래면 외초리 해안에 우뚝서 있으며 옛날 곡식을 갈던 멧돌 손잡이가 꼭두처럼 생겼다고 해서 '꼭두녀'라 불렀다 한다. 바다낚시 장소로 각광을 받고있어 매년 많은 낚시꾼이 찾아오는 곳이며 우주센타가 건설될 인근에 위치해 있어 연계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을 곳이다. Slide45: 소록도 중앙공원 전국적으로 보기드문 공원이나 한센병 환자가 집단 정착하여 요양하는 곳으로 세계속의 해양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중이다. 녹동에서 1㎞가 채 안되는곳에 있는 섬으로 섬의모양이 어린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르며 섬의 길이는 14㎞,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5배되는 작은섬이다. 특히 중앙공원은 황금편백, 실편백나무 등으로 잘 가꾸어져 있고 공원 곳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나환자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가 유명하다. 1916년 이곳에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한 이후 이제는 소록도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마음을 갖고 아우린다면 끝없는 비탄과 좌절의 땅이 아닌 희망의 섬으로 우리앞에 다가올 것이다. ※녹동항-소록도-금산(거금도) 연륙 연도교 가설중 Slide46: 용바위터 영남면 우천리 해안의 반석과 암벽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먼 옛날 남해바다의 해룡이 하늘로 승천할 때 이곳 암벽을 타고 기어 올랐다하여 그 자국이 너무도 뚜렷하게 남아있어 보는이로부터 신기함을 자아내게하며 지금도 입시생이나 고시생을 둔 부모들이 방문하여 촛불을 켜고 공을 드리는 분들이 많아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고, 주변이 넓은 반석으로 이루어져 단체나 가족단위 나들이 장소로, 또는 주변전체가 갯바위 낚시터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Slide47: 봉래사 - 봉래면 신금리 덕암산(德巖山)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松廣寺) 승려 주판암(朱判岩)이 1935년 봉래면 덕암산 아래에 초가 3칸을 건립하여 송광사 승려 이명송 수인(李明松守寅)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비롯되어졌다. 이명송수인이 초벽만 발라진 초가 3칸을 완성하였다. 1938년 여름에 법당 4칸을 창건하여 비로소 신흥암이라 하였다. Slide48: 팔영산(八影山) - 팔영산은 높이 608.6m로 전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스릴 넘치는 산행을 즐길수 있는 곳으로 산자락 아래 징검다리처럼 솟은 섬들이 펼쳐진 다도해의 풍정을 감상하기에 둘도없이 좋은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한 중국의 위왕이 이산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고 신하들이 조선의 고흥땅에서 이 산을 발견한 것이 그 이름의 유래라고 한다. 산은 그렇게 높은편은 아니지만 산세가 험준하고 변화 무쌍하여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길수 있다. 위험한 곳에는 철계단과 쇠줄이 설치되어 있어 별다른 준비없이도 산행에 나설수 있는 가벼운 암릉산행지다.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4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던 능가사가 있다. ※ 1봉(유영봉), 2봉(성주봉), 3봉(생활봉), 4봉(사자봉), 5봉(오노봉), 6봉(두류봉), 7봉(칠성봉), 8봉(적취봉) Slide49: 마복산(馬伏山) - 마복산은 높이 539m로 말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마복산의 산등성이에는 수많은 지릉이 흘러내리고 그 지릉마다 바위꽃이 활짝피어 있어 마치 금강산이나 설악산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이러한 경관 때문에 마복산은 소개골산(小皆骨山)이라 불리기다 한다. 마복산이 지닌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다도해 전경이다. 산 남쪽에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아름다운 곳, 산등성이에 올라 푸른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한 올망졸망한 섬들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그 사이사이 들어앉은 포구를 바라보노라면 보는 이마저도 바다에 떠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Slide50: 천등산(天燈山) - 천등산은 높이 550m로 바다로 열린 산이다. 고흥반도 최남단에 솟은 이 바위산은 한때 수군만호가 지킨 조운(漕運)의 경유항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한 어항으로 풍남항을 굽어보며 다도해 여러섬을 호령하듯 솟아있다. 천등산은 올라가 보아야 그 진가를 알수 있다. 아래에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바위산으로 뭉뚱그려 보이지만 올라가 보면 암릉들이 세밀하게 흩어지고 갈라져 새로운 흥분을 야기한다. 봉우리가 하늘에 닿는다 해서 '天燈'이라고도 하고 금탑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들이 있었을 옛날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천개의 등불츨 바쳤다는 설과 금탑사 스님들이 도를 닦으려고 많이 올라 밤이면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해서 '天燈'이라 했다고도 한다. 천등산 정상에는 철쭉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을 비롯한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천등산 동쪽 산허리에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금탑사와 이 사찰을 중심으로 비자나무숲이 형성되어 있다. Slide51: 적대봉(績臺峰) - 적대봉은 높이 592m로 고흥군 금산면(金山面) 거금도(居金島)에 솟아 있는 적대봉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안에 큰 금액이 뻗어 있어 거금도라 불린다는 이 섬은 조선중기의 문헌에는 '거억금?巨億今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적대봉 정상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봉수대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남한에서 거의 유일한 원형 봉수대로 알려져 있는 적대봉 봉수대는 둘레 약 34m, 직경 약 7m로 경남의 남대천 봉수대(지방문화재 제147호)와 거의 비슷한 규모다. 적대봉의 주변의 해안경관도 뛰어나다. 섬의 오천리는 해안선을 따라 조약돌이 널려있는 등 독특한 풍광을 보여주고 은빛백사장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Slide52: 운람산(雲嵐山) - 운람산은 높이 487m로 두원면과 포두면의 경계에 있다. 산이 높이 솟아 구름같은 기운이 산을 감싸고 있다하여 운람산이라 부른다. 골짜기에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산에서 금석병용시대의 동검, 동추 등이 발굴되었다. 옛 흥양지에는 흥양현 북쪽 15리에 있고 이 산에 죽사(竹寺), 은석사(隱寂寺), 중흥사(中興寺)가 이어져 내려왔었으며 용은사(龍隱寺)라는 말사(末寺)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수도암만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조선말기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이 흥양현감으로 재임시 이곳 운람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사실이 기우제문과 함께 전하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운암산(雲岩山)으로 표시되어 있고, 고흥 향토기록에는 이산을 일명 모악산(母岳山)으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Slide53: 봉래산(蓬萊山) - 봉래산은 높이 391m로 코스가 완만하여 가족단위 등반이 가능하고 정상에 올라가면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과 인근 화정면 선죽도를 가까이 함께 볼수 있다. 하늘을 찌를 듯 군락을 이루고 있는 80년 이상된 삼나무 편백 3만주가 울창한 숲을 형성하여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보는이로 하여금 숲이 주는 편안함과 자연에 도취되어 감탄을 자아낼 정도이며, 국내 대표적 희귀 야생화인 복수초(福壽草)의 대규모 자생 군락지가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며, 이승의 경치에 매혹되 승천시기를 놓쳐 소나무로 환생했다는 전설을 가진 100년생 추청된 신비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앞으로 우주센타 건립이 본격화되면 삼림욕장 등 휴식공간으로 개발할 계획이어서 우주센타와 함께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것이 확실하다. Slide54: Slide55: Slide56: 발포해수욕장 신경통,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는 모래찜질용 탕사가 길게 걸쳐 있으며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다. 주변에 가볼만한 곳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1580년(36세) 발포 만호로 첫부임하여 18개월간 재임했던 역사 유적지인 충무사와 백로 왜가리 도래지(기념물 제33호)가 있다. Slide57: 덕흥해수욕장 - 500여 그루의 송림과 주변의 기암괴석 등 해안경관이 수려하며 간조시에도 물이 깨끗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수심이 낮아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당하고 주변에서 갯바위 낚시도 즐길 수 있으며 연륙교 준공으로 교통이 편리하다. Slide58: 풍류해수욕장 고흥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정도 가다가 두원 대전 해수욕장을 못가서 좌측으로 고흥만간척사업소 현장 이정표와 함께 좌회전하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작고 아담한 풍류해수욕장을 발견할 수 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간조시 갯뻘에서는 가족과 함께 여러종류의 조개를 잡을수 있어 가족단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59: 소록도해수욕장 - 녹동에서 1㎞가 채 안되는 곳에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어린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르며 섬의 동쪽에 소록도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경치가 뛰어나고 기후가 따뜻하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고운 모래사장은 이국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평균 수심은 1.5~2.5m이다. 이곳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완벽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으며 섬내에서의 숙박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녹동항에 있는 숙박업소를 이용하여야 한다. Slide60: 금장해수욕장 - 해수욕장 전체가 자갈로 이루어졌고 울창한 소나무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족단위 피서객 또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1.5㎞의 경사가 완만하고 아담한 해수욕장 앞으로는 수평선이 쭉 펼쳐져 있어 가슴이 확트이는 곳이다. 시원한 해풍과 어울어진 시골의 정겨움까지 느낄수 있는 포근한 곳이다. Slide61: 고라금해수욕장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 썰물땐 갯벌에 나가 조개나 소라를 주울 수 있어 해수욕의 또다른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고라금 해수욕장은 정면으로 장흥 관산이 지척으로 다가와 보이고 주위 경관이 탁 트여 한 눈에 들어와 눈을 즐겁게 하고 주위엔 낚시터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Slide62: 남성해수욕장 Slide63: 팔영산 휴양림 - 해발 608m의 팔영산은 8개의 아름다운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일렬로 이어져 있는 도립공원으로 휴양림은 동쪽계곡에 있다. 휴양림 뒤쪽의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여자만과 다도해, 일출의 장관을 볼수 있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고로쇠나무 등 참나무류가 주를 이루는 천연림으로 고라니, 산토끼, 꿩, 참새, 노루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야영장, 물놀이터 등의 휴양시설과, 평행봉 등 16종의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능가사에서 흔들바위를 지나 제1봉부터 제8봉을 거쳐 능가사로 돌아오는 등산로와 휴양림에서 출발하여 제1봉부터 제8봉을 지나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등산로가 있다. 주변에 신라의 원효가 창건한 고찰인 금탑사와 도 문화재인 능가사를 비롯, 용바위, 남열해수욕장, 유청신피난굴, 여호바다, 강산호 낚시터, 발포 왜가리 도래지, 나로도 난대림,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등 관광지가 있다. Slide64: 유자공원 고흥과 녹동사이 국도변(풍양면 한동리)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숲을 이루고 있는 유자공원에 오시면 늦가을 매혹적인 유자향기를 만끽하면서 공원 산책로를 따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고 결혼 야외촬영, 가족․친구들과 기념사진도 품위있고 멋있게 찍을 수 있다. 유자공원 특산품 전시판매장에 오시면 고흥 유자 재배의 역사, 특성, 약리효과 등 고흥유자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유자제품으로 생과, 유자쥬스, 유자청 등 가공제품을 비롯한 고흥지역의 우수한 농산물을 싼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 유자공원 특산품 전시판매장(061-832-1656) Slide65: 과역리 민등지석묘군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게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축조되는 유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석묘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 요령성과 일본의 구주지방에도 분포하나 우리나라가 중심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무덤방(石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卓子式)과 지하에 있는 것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하에 있는 것은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碁盤式)과 없는 것(蓋石式)이 있는 것이많다. Slide66: 과역리 민등 지석묘 과역면소재지에서 벌교쪽으로 1km 떨어진 나즈막한 고개마루를 이루는 산기슭하의 구릉에 5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민등마을의 동북쪽으로 15호 국도 사이이다. 점암 저수지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세장한 계곡평지의 북쪽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주변에는 지석묘들이 6개 군 150여 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들은 산기슭의 구릉상에 56기가 구릉방향 즉 동서방향으로 50여m, 남북으로 35m의 타원형을 이루며 군집되어 있다. 지석묘의 군집 배열은 동서로 2열 정도 뚜렷하나 전체적으로는 무질서한 편이다. 지석묘의 규모는 길이가 400cm 이상이 3기이고, 300cm 이상도 5기밖에 안되어 200 ~ 300cm가 주를 이루고 있다. 길이 150m 미만도 16기나 되어 상당수는 파괴된 지석묘의 상석으로 생각된다. 두께도 100cm 이상이 7기이며, 대부분 60 ~80cm가 많다, 지석묘 중 규모가 큰 것은 군집열의 가운데에 위치하며, 가장 큰 것은 길이 540cm, 너비 250cm, 두께 130cm로 약 35톤 정도이다, 이 지석묘군은 일부 파괴되어 있지만 비교적 원형이 남아있는 것으로 50여기 이상이 군집된 곳이다. Slide67: 도천리 고인돌 도천리 지석묘군은 월악산 줄기나 남서로 뻗어 내리면서 나즈막한 구릉상을 이루고 있는데, 이 구릉상에 두 개군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15호 국도변에 있는 과역리 민등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월악마을 진입로를 따라 200m 떨어진 고개마루 정상부에 해당한다. 지석묘들은 두 개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 있는 것은 원래 13기였으나 지금은 8기만 남아있다. 이 지석묘군의 가장 북쪽에 비교적 큰 상석 1기가 있다. 그 크기는 길이 280cm, 너비 235cm, 두께 215cm로 구형(球形)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상석은 묘역을 상징하는 지석묘로 생각된다. 이 지석묘의 남쪽에 있는 것들은 길이 100 ~ 200cm의 소형들로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파괴된 것들도 있다. 이 지석묘 군집과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석묘군은 37기가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군의 배치는 구릉능선을 따라 대체로 4열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큰 것들은 열의 가운데에 분포되어 있다. 지석묘의 크기는 300cm 이상이 2기이고, 200 ~ 300cm가 17기로 소형들이 대부분이다. 두께에서도 100cm 이상이 5기 정도이고, 70cm 미만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석묘들이 땅에 밀착되어 있으나 받침돌이 드러난 것은 두께가 70cm 이상의 지석묘 12기에서 확인되었다. 이 지석묘군 중 남쪽에 있는 8기는 고흥 ~ 벌교간 국도확장 공사로 발굴 대상에 포함되어 있어, 발굴 후 인근에 복원하여 보존할 계획이다. 이 지석묘군 주변에서 반월형 식도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또 백제토기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Slide68: 도천리 지석묘군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Slide69: 중산 고인돌 중산리 지석묘군은 천봉산(千鳳山)의 서남향으로 뻗은 줄기가 득량만과 만나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숲속에 대부분 있으며, 일부는 밭과 민묘, 주위에 도괴된 채 있는 것도 있다. 중산마을의 동쪽 산기슭으로 중산재 동남쪽 기슭으로 득량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40여 기가 산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조그마한 도랑을 경계로 한 그 남쪽에 5기, 북쪽에 5기와 선돌처럼 세원진 지석묘 1기가 있다. 이 선돌같은 지석묘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선돌백이'라 부르고 있다. 지석묘들은 규모가 큰 것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받침돌이 고인 것은 15기 정도이고, 땅에 밀착되어 받침돌의 유무를 알 수 없는 것이 26기, 덮개돌(上石) 밑에 무덤방을 덮은 뚜껑돌(蓋石)이 드러나 있는 것 6기 등이다. 규모가 큰 지석묘는 길이가 550cm, 너비 460cm, 두께 90cm 크기의 대형 덮개돌 밑에 받침돌 4개가 고이고 있어 그 하부가 들여다 보인다. 또 다른 것은 길이 500cm, 너비 210cm, 두께 120cm 크기의 덮개돌 밑에 받침돌 4개가 고이고 있다. 이처럼 길이가 4 ~ 5m나 되는 대형 지석묘들은 받침돌이 4개 정도 고인 남방식 지석묘이다. Slide70: 중산리 지석묘군 Slide71: 유둔 고인돌 유둔리 덕암 지석묘는 동강면소재지의 남쪽에 있는 구릉상에 있다. 이곳은 유둔리 성안마을의 진산인 표고 100m의 야산이 동진하여 덕암마을의 북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좁고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지석묘는 덕암마을과 15호선 국도의 중간쯤의 구릉 정상부에 약6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구릉의 남쪽은 좁은 계곡평지가, 북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이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평지이다. 이 평지를 중심으로 하여 약 180여 기의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의 하나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암 지석묘는 구릉의 방향과 같이 북동 ~ 남서방향으로 수열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규모는 대개 200 ~ 300cm 내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지석묘의 상석이 땅에 밀착된 것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받침돌이 고인 것과 상석 아래 석실의 일부에 잡석이 채워진 것도 있다. 그리고 파괴된 상석이 겹쳐진 것도 있다. 이 지석묘의 가운데에 선돌(立石) 1기가 세워져 있다. 이 선돌은 높이 380cm, 너비 200cm, 두께 60cm로 규모면에서 초대형에 속한다. 지석묘들은 선돌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에워싸인 듯이 군집되어 있다. 덕암 지석묘군은 60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초대형 군집군이며, 선돌이 지석묘 축조시에 세워진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하나의 거석문화로 공존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지석묘 중 대표적인 지석묘군의 하나로,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Slide72: 동강면 유둔리 덕암 지석묘군 Slide73: 흥덕사 고흥의 관문이라 할 첨산(尖山; 일명 필봉) 아래에 있다. 지지류(地志類) 등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1966년 고흥향교에서 간행한 고흥군지(高興郡誌)에 첨산암만이 나타난다. 1986년에 세운 첨산흥덕사적비에는 금지연화(金池蓮華)의 명지에 불도장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영조연간(영조52년. 1776)에 첨산 북방중턱에 낙안사(樂安寺), 남방중턱에 흥양사(興陽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 흥덕사는 1929년에 기불대사란 분이 초가로 지어 석로암(石老庵)이라 하다가 1962년 첨산사(尖山寺)로 개칭하고 1973년에 확장하면서 극락전을 신축하고 사명을 흥덕사라 했다고 한다. Slide74: 수도암 두원면 운대리 운곡(雲谷)의 운암산(雲嵐山)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 명승(名僧) 도희(道喜)가 창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영허(暎虛)가 중수했다. 조선시대에 3~4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중종(中宗) 12년(1517) 화주(化主)인 인종별좌(印宗別座)가 나한전(羅漢殿: 무루전「無漏殿」)을 건립하였다. 설암추붕이 수도암에 와서 칠언시인 모악산 수도암(募岳山 修道庵)을 지어 남겼다. 숙종 25년(1699) 설읍(雪邑)에 거주하는 신자(信者) 이공(李公)과 이란(二難) 양인이 금생(今生)에 복전(福田)을 심어 내세(來世)에 두율정토(兜率淨土)에의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불량(佛糧)을 시납하기로 하였다. 또한 철종 11년(1860) 3월에 아미타(阿彌陀) 삼존정화(三尊幀畵)가 조성되어 봉안되었다. 왜정시대인 1933년경 리산․최유일(彖山․崔裕一)이 주지직을 맡았는데, 그 이후로 사찰면모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Slide75: 능가사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 아래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찰. 신라 눌지왕(訥祗王) 원년(416)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빙성은 의문. 팔영산 중턱에 보현암(普賢庵)이 창건되어(아도화상이 포교를 위하여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 뒤에 보현사로, 이 보현사가 뒤에 능가사로 되었다고 능가사 사적비(楞伽寺 事蹟碑)에서 밝히고 있으나 지리지류(地理誌類)에서는 서로 다른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해 불에 타 버려 폐찰. 인조(仁祖) 22년 황명숭정갑신(皇明崇禎甲申 : 1644) 정현대사(正玄大師)가 하안거(夏安居, 4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 90일 동안 승려들과 방에 모여 수도함)를 하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서 '장부(丈夫)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 어려우므로 마땅히 대공덕주(大功德主)가 되어 종풍(宗風)을 홍포(弘布) 하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이에 정현대사는 광희사(廣熙師)와 함께 산을 살펴보게 되었다. 산의 남쪽에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요사채․불상․탱화․종각․목어각 등 불사를 함으로써 정현이 창건주가 되어 능가사를 시창하였던 것이다. 정현대사가 멸도(滅道 :入寂)하게 되자 그의 제자 민정(敏淨), 의헌(義軒), 상기(尙機) 등이 스승의 유지를 좇아 문(門)의 요사채를 단청 불사함으로써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일련의 사찰 당우 불사가 이루어지자 사승(寺僧) 수명(透明)이 능가사의 사적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천리를 달려 통정대부홍문관 부제학 (弘文館 副提學) 오수채(吳遂采)에게 청문하여 숙종 16년(1690) 능가사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Slide76: 송광암 - 금산면 어전리의 용두봉산 동쪽 중턱에 있는 암자인데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그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사찰에서 근래에 정리한 금산송광암연혁(錦山松廣庵沿革)에는 고려 신종(神宗) 3년(1200)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선조(宣祖) 3년(1570) 선조국사가 세웠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빙성이 의심된다. 2~3차 중수를 거쳐 1748년 (건융 13무진),치찬장로(致粲長老) 4창, 1796년(건융 36 갑진) 양익비구(良益比丘) 5창, 1806년(가경 11) 양익 6창, 1956년(함풍6) 지전등천(持殿燈天) 내주봉실(來住奉實) 공양주 이원(理元)이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상량 7창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 건융년간(乾隆年間 : 英祖12, 正祖19 :1736~1795)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도(阿彌陀三尊佛圖)가 봉안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불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7차의 중수를 거쳐 1954년에 김원광(金圓光)․최봉암(崔鳳岩) 주지 스님이 8차의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최근 1982년 손석봉(孫石峰) 주지가 9창하고 1986년 진입도로 개설, 1989년 6월에 불사를 하였는데 크라운 제과 사장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Slide77: 금탑사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14 흥향현 불우조(佛宇條)에 사명(寺名)조차도 보이지 않던 금탑사가,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인「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전라도 권 5 하 흥양현 사찰조에 사명이 비로소 있을 뿐 아니라 대동지지(大東地志) 흥양산수조(興陽山水條)의 천등산의 세기(細記)에 신라문무왕 태봉금탑사(新羅文武王 胎封金塔寺) 기록이 별안간 나타나고 있다. 금탑사의 초창이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보여진다. 임진왜란(정유재란)때 섬 오랑캐로 인해 불 타 무너졌다고 한다. 이 피해로 폐사찰이 되어 단지 1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0년(1597) 궁현․옥순대사(弓弦․玉淳大師)가 중건했다가 숙종 18년(1692) 불에 타버리고 극락전(極樂殿)만 남았다고 한다. 설암추붕(雪巖秋鵬 : 1651~1706)이 금탑사에 와서 칠언율시(七言律詩) andlt;금탑사구호(金塔寺口號)를 남겼으며 고흥 출신인 영해약탄(影海若坦; 1668~1754)도 오언시(五言詩)인 제금탑사(題金塔寺)를 지었다. Slide78: 금산 목장성 금산면 목장성은 금산의 주봉인 적대봉(積台峰 : 표고 592.2m)과 용두봉(龍頭峰 : 표고 418.6m) 사이에 거의 남북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있다. 남쪽의 어전리 금장마을에서부터 북쪽의 석정리 성치마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4.5km에 달한다. 이 성은 5만분지의 1도상에도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몇가지 전설도 구전되어 오고 있다. 거금도는 행정명으로 금산면이며, 고명은 절이도이다. 이 절이도에 목장과 목장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고흥군사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Slide79: 고흥만 방조제 고흥만 방조제는 2.873m로 확트인 바다를 조망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수 있는 최적의 코스와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고흥만 방조제 공원은 조성면적이 1ha로서 편백나무등 조경수를 식재하여 주민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80: 고흥만 방조제 공원 고흥만 방조제는 2.873m로 확트인 바다를 조망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길수 있는 최적의 코스와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고흥만 방조제 공원은 조성면적이 1ha로서 편백나무등 조경수를 식재하여 주민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Slide81: 연도교 포두면과 내나로도를 연결한 380m의 연륙교와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잇는 450m의 연도교가 개통되어 수려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의 해수욕장, 사계절 바다낚시터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Slide82: 연륙교 - 포두면과 내나로도를 연결한 380m의 연륙교와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잇는 450m의 연도교가 개통되어 수려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의 해수욕장, 사계절 바다낚시터를 찾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Slide83: 녹동항 녹동-벌교 4차로 개통, 금산 연륙교 가설과 함께 물동량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남해안의 해상 교통 요충지이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